어렵사리 벼르고 벼르며 몸 컨디션이 좋은 날을 잡아 병원 예약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빠지기 시작한 이빨 때문에 지금껏 속을 끓여왔다. 나이를 더해 갈수록 이빨 치료의 강도는 높아만 가는데, 이번에도 잇몸 수술로 여섯 대의 마취 주사를 맞았다. 오늘따라 더욱 긴장되고 두려운 가운데 대기하고 수술하고 녹초가 되어 나온 시간을 재어보니 무려 3시간 여, 밖에서 기다리던 남편이 나보다 더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한 끼도 못 참는 그가 점심시간도 한참을 넘겼으니 뱃속이 오죽했으랴.
마취약이 채 깨기도 전에 그냥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눈에 익숙하지 않던 병원 길이 돌아갈 때는 더욱 까다로워, 긴장하며 도로안내판을 본다는 것이 순간 진입해서는 안 될 옆길로 빠져들고 말았다. 노년이면 누구나 고속도로를 달리다 눈도 침침하고 뒷 차를 의식하다 길을 놓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필이면 체력이 고갈된 이때 남편도 나도 당황한 채 한참을 거꾸로 달리던 길을 벗어나 방향을 바꾼 뒤, 겨우 차를 정상방향으로 올려놓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길눈이 어두운 남편의 순간 실수도 있겠지만 덜 풀린 마취약으로 멍한 머리와 침침한 눈으로 도로 위에 걸린 안내판을 제대로 못 읽은 내 탓도 있다면서 서로를 위로한다. 이래서 집 가까이 있는 치과를 선택하라는 주위의 말도 일리가 있다면서 투덜거리는 나를 보고 “그래도 나이가 지긋한 경험 많은 의사를 찾아가야지”라고 말하는 남편.
CVS에서 처방약을 받고 셀프서비스 체크아웃 계산대를 나온 남편은 영수증에 붙어있는 세일 상품광고가 유난히 많다면서 흔들어 보인다. 급한 김에 가까운 음식점에서 갈비탕과 설렁탕으로 남편의 배를 달래주고 남은 음식은 집에 돌아와 국물로 대충 영양보충을 했다.
지혈이 채 가시지 않은 불쾌감과 통증으로 저녁도 거른 채 휴식하고 있는데 남편이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기색이다. 낮에 CVS에서 사온 치실과 약품을 담은 비닐봉투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묻고 있기에 그제서야 들고 왔어야 할 봉투 생각이 난다. 머리 속이 백지 상태란 이를 두고 한 말인 듯, 있을 만한 곳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질 않는다. 집안에도 차 안에도 있어야 할 봉투가 끝내 보이질 않자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건망증과 치매를 들먹인다. “그럼, 혹시 CVS에 두고 왔나?” 속는 셈치고 가보자고 남편이 차를 몰고 나갔다. 한참만에야 현관에 들어서면서 캐시어가 보관해 둔 비닐 봉투를 높이 쳐들어 보인다. 영수증에 덧붙은 기다란 세일 품목에 정신이 팔려 정작 갖고 와야 할 물건은 계산대에 두고 깜박한 남편이다.
흔히 주위에서 나와 비슷한 사례를 많이 들어 보긴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우리도 역시다. 약봉지를 찾은 안도감에 잠시 잊고 있던 마취약이 이제야 완전히 풀리는지, 얼얼하던 입안이 스물 스물 간지럽다. 오늘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아마도 정신 바짝 차리라는 빨간 신호등의 경고 메시지로 여겨진다.
<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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