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글에서 ‘어공’이란 단어를 접했다. ‘어쩌다 공무원’이란다. 나는 ‘어회’라 해야겠다. ‘어쩌다 회계사’가 되었으니.
나는 어려서부터 영화를 무척 좋아해 일찍이 중학교 때부터 미학을 전공해 영화평론가가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고3 때, 당시엔 입시시험을 치른 후 대학원서를 썼던 시기에 미학과를 지원하겠다고 하는 내게 담임선생님은 ‘너는 법이나 경제, 경영을 해야지 인문학은 안된다’고 극구반대하셨다. 고집을 꺾지 않고 미학과를 택했지만, 막상 대학에 와 적성에 안 맞아 패션 디자인에서 법, 경제학 등 이것저것 해보다가 경제, 특히 국제금융과 금융공학에 관심이 있는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다.
회계사가 되리라는 생각은 없이, 단기간에 금융 공부를 하기 위한 과정으로 회계사 시험을 보았다. 대학원에서 국제금융 한 학기를 마칠 무렵 회계사 시험 합격통지를 받았다. 시험에 합격한 후 회계학과 교수님께 인사하러 갔을 때, 교수님께선 내게 “어느 회계법인에서 연수를 받을 것이냐”고 물으셨다. 대학원에서 국제금융을 마친 후 미국으로 유학 가 공부를 더 하고 월가에서 일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연수를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교수님은 일장 훈계와 회유를 시작하셨다.
“네가 시험에 붙음으로 수년간 준비한 누군가가 떨어졌을 것이다. 그 사람의 몫까지 네가 열심히 배우고 일해 이 사회에 공헌해야지! …. 회계나 세무 하면 지루하다고 생각하지만, 회계는 전 세계 공용언어고 기업이 망해도 마지막까지 일할 수 있는 자리가 회계란다. 너는 능력 있는 여성이니 분명히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될 거고, 그러면 요즘 세상엔 세계 어느 곳에 가서 살게 될지 모르는데 회계만큼 더 좋은 분야가 없단다.”
그리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교수님의 친구분인 삼일회계법인의 한 파트너에게 전화를 거셨다. “내 제자를 네게 보낼 테니 혹독하게 일을 가르치고 시키라”는 당부를 남기셨다. 그렇게 나는 회계사의 길로 들어섰다.
최근 내 모국과 모교를 만신창이로 만든 조국의 자녀들의 입시 및 장학금 특혜 논란 등을 접하며 떠오른 이가 있다. 내 둘째 오빠가 대학 1학년 여름 끝 무렵에 집에 데리고 왔던 학과 친구. 술이 몸에 받지 않아 술을 잘 못하던 오빠가 술에 떡이 된 과 친구를 끌다시피 해서 밤늦게 들어왔다. 오빠 걱정으로 잠을 못 주무시고 기다리시던 엄마가 언짢은 표정을 하자, 오빠는 친구를 방에 눕히고 나와 말했다.
“제가 언제 술친구를 집에 데리고 온 적이 있었나요? 저 친구는 정말 저 지경이 될 만한 사정이 있어 그러니 내일 아침 해장국이라도 끓여주세요. 저 친구 집이 가난한 시골인데 대학 첫 학기는 서울대 경제학과에 합격했다고 온 동네에서 잔치를 하고 십시일반 도와줘서 겨우 학비를 내고 학교에 들어오긴 했는데 학생운동 하느라 학점을 못 챙겨서 장학금을 못 받고 학비를 마련할 수가 없어 결국 2학기 등록을 못하고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어요.”
때가 1987년이었다. 그해 1월에 서울대생 박종철이 연행되어 고문당하던 때. 양심이 깨어있는 학생은 그저 공부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시대였다.
입시나 장학금 특혜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눈먼 사랑으로 인한 작은 오류라 치부할 일이 아니다. 그들이 가로챈 그것이 그 누군가에겐 일생이 달린 일이었을 수도 있으니.
“이삭을 거둘 때 일한 일꾼들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고 땅에 떨어진 이삭은 애써 다 거두려하지 말고 일꾼으로 일하지 못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남겨놓아라”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한 이 말씀을 기억하며, ‘나는 그 누군가의 몫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대신 그 몫까지 책임을 다하는가’ 빨갛게 물들어가는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묻는다.
<
송윤정 / 금융전문가 맥클린, VA>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