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오후에 교회에서 친교를 마치고 나오며 밖을 보니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예배 중에 큰 소리로 본당 천장 유리창에 쏟아지던 장대비가 어느새 가랑비로 변했다. 문을 열고 나와 우산을 펴다가 보니 P 장로님이 혼자 처마 밑에 서 계셨다. 이미 교인들이 많이 돌아가 주위는 적요(寂寥)했다. 아무도 없고 특별히 밖에 할 일이 보이지 않는데 왜 나와 계실까 하는 생각에 목례를 하고 지나치다가 인사말을 건넸다.
“어째 밖에 나와 계세요?”
장로님은 싱긋이 웃으며 말한다.
“비가 좋아서요.”
나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교회에 오면 P 장로님은 여러 가지 교회 행정 일로 늘 바쁜 모습을 멀리서 뵈었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정경을 느긋이 바라보는 초로의 장로님이 새로워 보였다.
무더운 날씨가 물러가며 시작된 가뭄이 9월 한 달 내내 극심했다. 말간 9월 하늘에 지쳐 있던 중에 내리는 단비다. 오랫동안 기다렸으니 반갑기 그지없고 꽃도 나무도 기력을 되찾았는지 생기가 돈다. 올봄에 감나무 묘목을 집 뒤뜰에 한 그루 더 심어 우리 집에는 두 그루 감나무가 있다. 그 중 한 나무의 잎 몇 개가 어느새 따뜻한 주황색으로 변했다. 아직 단풍이 들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벌써 단풍이 드는가 반가우면서도 의아했다. 알고 보니 단풍이 아니고 오랜 가뭄에 감나무의 가장 연약한 잎의 색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사람도 식물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나도 과로하면 내 몸의 약한 부분인 잇몸에 먼저 통증이 온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가뭄을 견디다 못해 색이 변한 잎을 달고도 의젓한 자태가 대견하고 애틋하다. 아직 묘목이건만 감나무의 품위가 느껴진다.
가뭄이 새로운 것이 아니건만, 뉴스에서는 수십 년만의 9월 가뭄을 연일 보도하며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편하게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 플라스틱을 줄여야 하고 먼저 플라스틱 빨대를 오래 쓸 수 있는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한다. 인류가 발명한 물품 중에 플라스틱은 산업 혁명에 큰 공헌을 했지만, 그로 인해 지구 환경에 돌이키기 어려운 타격을 주니 참 아이러니하다. 새삼 모든 사물과 삶에 내재돼 있는 장단점을 들여다본다. 정직한 눈이 보는 것을 넘어 또 다른 면을 생각하고 예측하는 것도 나이 들며 자연스레 익히는 것 중의 하나다.
“아, 비가 참 좋네요.”
나는 대답하며 우산을 펴들고서도 막상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가을 가랑비가 소곤소곤 속삭이듯 대지를 적시고 있다. 장로님이 바라보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올리며 비 내리는 가을 오후에 잠시 젖었다. 가느다란 목 위에 색색으로 핀 코스모스가 어리광을 부리듯 한들거린다. 나무마다 노랗고 붉은 색으로 단풍이 든 수많은 잎이 빗속에 함초롬한 모습을 보인다. 비로소 가을이 제 자리에 온 듯하다.
“장로님,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 정취를 더 느끼고 싶었지만, 우산을 받치고 빗속으로 들어갔다.
“예, 안녕히 가세요.”
장로님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천천히 주차장으로 걸었다. 차를 뻬서 교회 입구로 나오니 그때까지 장로님은 처마 밑에서 비가 내리는 하늘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님도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계실 것 같다.
<박현숙 / 워싱턴문인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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