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2019년이 열흘 남짓 남았다고 생각하니 1주일 단위로 빠르게 지나던 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하루씩 흐른다. 올해에는 삶의 속도를 늦추며 의식적으로 천천히, 단순하게 살려고 애쓴 덕인지 한 해를 보내는 연말에 분주하고 쫓기는 마음이 줄어서 좋다. 고속열차를 타고 놓쳤던 차창밖의 풍경들을 완행 열차에 올라 여유롭게 즐기는 느낌이라고 할까?
삶의 템포를 늦추면서 경험한 변화들 중의 하나는 의무감에 눌려서 버겁던 집안 일에 마음이 담기게 된 것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모두 떠나 빈 둥지가 되었으니 예전에 비해 집안 일이 몇배로 줄어든 덕을 본다. 십여 년 전, 육아와 직장과 학교를 병행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정신없이 살던 때를 돌아보니, 늘 힘들고 지쳤던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었지 지나간 세월이 고맙다. 아무리 굴려도 꼭대기에 이르면 다시 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굴리는 시지프스처럼, 다 끝냈는가 싶으면 며칠 뒤에 다시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리던 집안 일이 참으로 버거웠었다. 지금 그런 힘겹고 지친 시간을 지나고 있는 젊은 부모들에게 ‘어떻게든 이 시간을 견뎌낼 힘을 얻으세요.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자랍니다’라고 공감 어린 조언을 해주고 싶다.
돌아보니 대학에 들어가면서 집안 살림을 맡기 전까지는 내 삶에도 ‘우렁 각시’가 있었다. ‘가난한 착한 노총각이 밭에 일을 간 사이, 우렁이가 예쁜 각시로 변해서 집안 일을 다 해놓았다’는 설화처럼, 서랍을 열면 깨끗한 양말과 옷가지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학교를 마치고 밤 늦게 돌아오면 맛있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월요일에는 하얗게 빨아진 실내화가 신발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고, 아무데나 벗어 놓은 옷도 며칠 후에는 제자리에 걸려 있곤 했다. 이 모든 일들이 나의 우렁 각시였던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내게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던 일이었다. 내가 우리 애들의 우렁 각시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냥 ‘저절로’ 된 일은 하나도 없었고, 엄마가 그렇게 내 삶의 배경이 되어 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며 내 삶의 배경이 되어준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오래 전 한 기관의 책임자로 일할 때에 뒤에서 필요한 것들을 조용히 채워주던 동료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름이 드러나는 내게 더 큰 칭찬과 격려를 보내줬지만, 질투나 시기심 없이 항상 나의 따뜻한 배경이 되어준 그 동료가 떠올라 뭉클한 감동이 밀려온다. 올해 시작한 <북Talk>을 통해 만난 참석자들 또한 처음 발을 띈 일이 지역사회에 활성화되게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그러한 마음으로 한 해를 돌아보니 감사의 지경이 넓혀진다. 내게 도움을 받았다며 고마움을 전하는 내담자들 또한 한 사람의 힐링과 회복을 함께 하는 소중한 경험을 내게 주었으니 나의 성장에 배경이 되준게 분명하다.
입장을 바꿔서 보니 나도 다른 이의 삶에 배경이 되주기도 했다. 가장 가까이는 우리 아이들과 가족들을 위한 드러나지 않는 수고와 섬김이 그들의 삶에 아름다운 배경이 된 듯하여 나 자신에게 ‘많이 애썼다’라고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아무도 모르게 베푼 작은 선행을 비밀처럼 혼자 간직하니, 흐뭇함의 미소가 땔감이 되어 마음에 따뜻한 난로가 지펴진다.
사는게 뭐 별거인가? 내 삶의 배경이 되어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 전하고, 지치고 힘든 누군가의 삶에 작은 격려와 응원을 보낼 수 있다면 ‘올 한 해도 잘 살았노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MonicaLeeLPC@gmail.com
<모니카 이 / 심리 상담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