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은 찰라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떠났고 텅 빈 숲은 깊은 침묵에 빠져 있다. 해야 할 일은 어제보다 많았고 시간은 너그럽지 않아서 나는 오늘도 정말 바쁘게 살았다.
계절은 순환을 하고 있는데 경계 없이 두루뭉술한 삶은 여전히 되풀이될 뿐이었다. 어쩌면 오늘을 살면서 어제를 살아냈다고 내심 안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년이라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많은 것을 이루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도 민낯으로 마주 해야 하는 시간임을 이제야 알겠다.
올 한 해도 나라 안팎으로는 믿기 힘든 사건 사고들이 뉴스라는 이름으로 세상 한 가운데에 걸리고, 또 사라졌다, 그리고 그 황망한 일들에서 나와 내 가족이 아슬아슬하게 비켜서 있음에 안도했다. 언젠가 준비 없이 내가 그 한복판에 서있게 된다면 오늘의 나처럼 비켜간 이들의 위로를 받으며 그동안 당연하게 누렸던 평화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뿐이었다.
우리 모두가 각자 짊어진 삶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어쩌면 서로 다른 길을 돌아오느라 주위를 돌아볼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고 변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연말 모임에서 듣게 된 한 사내의 이야기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잠시 숙연하게 했다. 어느 사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다 평소에 아내가 애지중지하던 가방을 발견했다. 그 가방은 결혼 25주년 기념일에 사내가 아내에게 큰 맘 먹고 선물한 일명 ‘명품백’ 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아내가 그 가방을 들고 외출한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하루를 살고 나면 다시 하루를 준비해야하는 빠듯한 일상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었다. 기껏해야 주말의 한낮, 그 짧은 외출이 고작인 일상에서 교회에 들고 가려니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고, 허술한 옷차림에 명품백을 들고 가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으리라.
그렇게 그 가방은 용도를 잃은 채 아내의 옷장 깊은 곳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사내의 기억에는 그 가방을 선물로 받았을 때 기뻐하던 아내의 모습만 또렷이 남아 있다고 했다. 아내는 외출할 때마다 꺼내보고 다시 넣어두며 차일피일 후일을 기다렸지만 끝내 그 후일은 오지 않았고 슬픈 유품이 되고 말았다.
아내는 가방을 ‘명품’으로 여기며 ‘명품의 그날’을 위해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것이다. 명품의 그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하는 회한을 남긴 이야기였다.
모든 것에는 이렇게 때가 있다. 자연은 그 스스로의 때를 알고 순응한다. 그것이 질서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순리하고 말한다. 사람에게도 그 때가 있다면 그게 ‘오늘’ 이어야 한다고 믿고 싶다. 내 나름대로는 한눈팔지 않고 정직하게 한 걸음씩 옮겨가며 살아 왔다고 생각했다. 어려움을 나눌 가족과 친구가 있고, 아이들도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뒤돌아보면 비틀거린 발자국만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세월의 괘도를 따라 지칠 만큼 달려 왔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면서도 때를 기다리며 머뭇거리다 놓치고 산 것은 없는지, 마지막 남은 한해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깊은 겨울 숲을 지나가는 동안 우리 모두는 벌거벗은 나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언 땅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는 겨울나무처럼 세상에서 돌아앉아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보는 시간이다. 가장 따뜻한 것은 사람의 체온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처럼 서로 기대어 이 겨울을 지내볼 일이다. 남겨진 꿈도 희망도 모두가 함께 누리는 이 겨울에 시인 오세영의 시 한 구절을 함께 나눈다.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 듯/ 우리도 그렇게/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 듯‘
[’나무처럼’ 중에서]
<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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