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트로스는 몸집이 컸지만 날갯짓 없이 하늘을 높이 날았다. 나는 날마다 거기가 거기인듯한 아무런 특색 없는 망망대해에서도, 녀석들은 어떻게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장장 1,500킬로미터에 이르는 먼 거리를 비행한 후 자기가 태어난 둥지를 향해 직선거리로 날아온다. 녀석들은 아무리 먼 곳에서도 자기 집을 정확하게 찾아내고 그것을 자기 집으로 인식한다. 녀석들에겐 탁월한 귀소본능이 있기 때문에 처음으로 돌아가는 능력이 비상하고 탁월하다. (베른트 하인리히의 ‘귀소본능’ 중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존재의 출생 보금자리를 동경하는 귀소본능(the homing instinct)을 가지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이 회귀패턴에 따라 살아간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 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회귀본능이 내면 깊은 곳에서 관솔불같이 수직으로 타오른다. 이 거룩한 욕망을 영혼의 귀소성(歸巢性)이라고 부른다.
팬데믹 이후 나 홀로 병에 걸려 방황하는 현대판 나그네가 급증하고 있다. 인간 존재가 흔들리고 방황하는 이유는 귀소본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귀소본능이 빈약한 사람은 영혼육을 하나로 묶는 통합능력이 취약하다. 그 결과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고 방황한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귀소본능의 위기를 겪었던 사람이다. 삭개오가 귀소본능의 위기를 겪은 것은 돈 때문이었다. 돈을 많이 벌면 즐겁고 행복할 줄 알았다.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와 이웃이 되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더 외로웠고 찾아오는 이웃도 없었다. 돌아가 안식할 영혼의 보금자리도 그에겐 없었다.
영혼의 보금자리로 돌아 갈 귀소능력을 상실했던 삭개오는 군중의 시선을 피해 높은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삭개오는 거기서 종일 예수를 응시 했다. 그 때 문득 예수가 삭개오에게 나타나 말씀했다. “삭개오야 거기서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날 밤 삭개오의 영혼은 예수의 품에 귀소(歸巢)했고 지고의 행복은 새벽 여명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인생의 행복은 무엇을 소유(to have)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 행복은 존재(to be)방식에 달려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주여 내 영혼이 당신 품에 안길 때까지는 내 영혼은 안식할 수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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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 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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