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핵무기 개발을 주도했다가 후회한 천재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스스로 판단해 적을 죽이는 ‘킬러 로봇’의 출현을 우려하는 과학자들의 모임에서 소환됐다. 지난달 29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자율무기시스템 관련 콘퍼런스에서 알렉산더 샬렌베르크 오스트리아 외교장관은 “지금이 우리 시대의 오펜하이머 순간”이라며 킬러 로봇의 규제 필요성을 역설했다. 1904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1945년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계획’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나 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 공격으로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죄책감에 빠져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하는 등 반전 운동에 나섰다.
‘오펜하이머 순간(moment)’은 오펜하이머가 핵실험의 과학적 성공과 함께 최악의 재앙을 부른 ‘선택의 순간’에 처했었음을 빗댄 말로 보인다. 지난해 개봉된 오펜하이머의 전기 영화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가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7개 부문을 휩쓴 열기에 기대어 샬렌베르크 장관이 인공지능(AI) 무기를 통제하지 못하면 끔찍한 인류 재앙을 맞을 수 있음을 경고했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지난해 12월 세계 150여 개국이 무기 체계의 AI와 자동화 등 새로운 군사 기술이 ‘심각한 도전과 우려’를 야기한다는 내용의 유엔 결의안을 지지한 것은 ‘킬러 로봇 공포’를 방증한다. 올해 초 미국 국토안보부는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미국의 생물학적·화학적 안보에 대한 규제 부족과 AI 활용 증가가 나쁜 행위자의 화학·생물·방사선·핵 공격 수행을 더욱 쉽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로봇 기술의 발전은 위기와 기회의 두 얼굴을 지녔다. 다만 킬러 로봇과 관련된 ‘오펜하이머 순간’에 대한 고민도 초격차 기술을 확보한 뒤에나 할 수 있다. 한국의 로봇산업 경쟁력은 로봇 밀도에서는 앞섰지만 종합 순위에서는 5위권 밖으로 평가된다. 연평균 36% 넘게 급성장하는 로봇 시장에서 낙오하지 않게 국가 역량을 총결집해야 할 때다.
<문성진 / 서울경제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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