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따로 따로 하루를 잡지만 여유가 없던 시절 워싱턴 당일관광 코스였다. 멀리서 손님이 오면 나도 이 코스를 따랐다. 시간이 영 안 되면 국회의사당에서 스미스소니언, 링컨 메모리얼까지 내셔널 몰을 훑는 시내구경으로 마치고 여유가 되면 차를 몰고 서쪽으로 향한다.
종유석 멋들어진 석회암 동굴이야 여기저기 있다지만 루레이 동굴은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기에 더 사랑받는 성 싶다. 거기에다가 존 덴버의 컨트리 로드 흥겨운 노래가 절로 나오는 셰넌도어의 한복판에 있어 오고 가는 길 자체가 좋은 구경이다. 프론트 로열에서 국립공원 입장료를 내고서 대공황 시절 경기부양책으로 닦았다는 스카이라인 드라이브를 타고 갔다가 돌아올 때는 워렌턴쪽 고갯길로 내려오는 코스를 좋아한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중늙은이가 다된 요즘과는 달리 이민 갓 와서 IMF 터지기 직전까지는 친구며 후배며 방문객들이 제법 많아 여러 차례 루레이 안내를 했는데, 처이모님이 어린 손자를 데리고 오셨을 때였다. 후배들이 출장팀으로 오거나 친구가 가족을 끌고 오면 차에 자리가 안 되니까 아내와 딸애는 집에 두고 나 혼자 갔다가 오는데 처이모님이니 당연히 아내도 따라가고 애 또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데리고 갔다.
산천구경 잘 하고 루레이에 당도하여 티켓을 사는 긴 줄의 끝에 우리도 섰다. 매표대에 적힌 입장료를 보고 암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당시 입장료는 기억이 나지 않으니 지금 기준으로 보자.)
시니어(62세 이상) $32
성인 $34
아동(6~12세) $17
5세 이하 free
1X32+2X34+1X17+1x0=117
우리 일행 다섯의 입장료 계산은 요로콤 간단한데… 내 계산은 쉽게 끝이 나지를 않는다. 초등학교 1학년, 만 여섯살에 턱이 걸린 딸. 아까운 것이다. 한국서 가져온 돈 까먹으며 힘겹게 버티던 시절이었다.
17불이면 우리 세 식구 유일한 외식이던 맥도날드 저녁 한끼가 해결되고, 한번 김치를 담그면 서너달은 버틸 수 있는 배추가 한 박스고, 최상품은 못 되어도 그럭저럭 윤기나는 쌀 20킬로 한 포대 값이다.
동양애들이 여기 애들에 비하면 덩치가 작잖아. 누가 쟤를 초등학생이라고 보겠어. 그런 내 안의 속삭임에 넘어갔다. 저기서 너 몇 살이냐고 물어보면 다섯 살이라고 그래, 파이브. 알았지?
사실 매표소 직원이 그렇게 따져묻는 경우는 없을 텐데도 한번 범행계획이 서게 되면 철저한 준비가 따르는 법. 낮게 소리 깔아 애한테 한번 더 다짐을 받는데 애 표정이 좋지 않다. 줄은 줄어들고, 애는 말은 않고 점점 울상이 되었다. 왜 그래, 어디 아퍼? 그 소리에 끝내는 울음이 터졌다.
당황한 우리는 줄에서 빠져나왔다. 왜 그러는데?… I am six. I cannot lie. 울먹이는 아이한테 너무 미안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몇 번을 약속했다.
거짓말 쉽게 하는 한국사회, 국민학교 시절 여름방학 곤충채집 숙제에서 일찌감치 위선과 거짓을 배웠다는 누군가의 글을 읽으면서 루레이 동굴 앞에 선 어린 딸과 젊은 아빠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직하라, 학교에서 배운 것을 반대로 거짓말을 하라는 아빠, 어린 딸에게는 동굴 입구가 지옥문이었을 거다.
<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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