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가게에서 한국 드라마를 열심히 빌려보던 시절에 작은 불만이 하나 있었다. 광고를 떼고 보여주는 것 말이다. 아니 한국광고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광고모델이 드라마 여주인공보다 얼마나 더 예쁜데. 스트리밍 서비스들도 디렉터 컷 그런 거 말고 커머셜 포함 선택이 있으면 기꺼이 봐주겠다. 드라마 전개와 무관한 뜬금 없는 PPL보다 낫다. 수익은 누가 챙겨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국말이 한 자라도 더 그리워서다. 그래서 페이스북 광고에 짜증을 내며 넘김넘김 하다가도 한글 광고에는 눈길을 멈춘다. 미국 땅 버지니아에 사는 내게 보여주는 한글 광고는 두 종류다. 미주 한인을 집중타깃으로 하는 광고, 이를테면 ‘미국 언니’ 어쩌고 하는 커뮤니티 홍보 부류와 송금 서비스 같은 것들이다. 그쪽은 관심 별로다. 다른 하나는 영어 광고의 한글판이다. 자동차 광고가 대표적이고 여기에 공익성 광고가 포함된다. 그중에서도 공익 광고가 관심이다.
굳이 한글 사용자를 찾아 뭔가 알리고자 하는 그 노력이 괘씸하도록 가상해서다. 나를 알아준다는데 마음이 가는 건 당연하지 않나. 이게 거저 된 것이 아니다.
있는지 없는지 그림자 취급 받던 소수계의 소수계였다. 먹고 살기 바쁜 중에도 시간 내고 돈 내서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꾸준히 목소리를 내어온 결과다. 투표소에 한글 안내 사인이 붙고 투표지에 한글 설명이 병기되기까지 여러 이민 선배들이 안 되는 영어로 쌓아온 수고가 있다. DC의 험한 동네에서 방탄유리에 의지해 번 피같은 돈으로 정치인들 후원도 많이 했다. 동포언론에서 일하며 그걸 지켜봤다.
딴 건 못 해도 투표장에 얼굴 비치는 것만큼은 꼬박꼬박 하겠다는 나와의 약속도 같은 맥락이다. 20 년 개근을 향해간다. 팬데믹으로 부재자 투표가 쉬워졌지만 그래도 직접 가서 한다. 아시안 얼굴을 자주 봐야 아시안을 이웃으로 생각할 것 아닌가.
공익광고로 돌아가서,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떴던 광고가 있었다. 버지니아 교통당국의 설문조사에 응해달라는 내용이다. 한글로. 트래픽 없는 시간에 주로 다녀서 그다지 관심은 없는데 문득 노파심이 생겼다. 한글 버전에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런 시도는 흐지부지되고 말 것 아닌가? 나라도 설문에 응해야겠다.
그렇게 마음 먹고 광고를 클릭했는데 어라? 스페니쉬 설문조사 화면이 나온다. 무늬만 시늉 냈나? 기분이 상해서 욕하고 넘어가려다가 그렇게 끝내선 안될 것 같았다. 안 되는 영어 쥐어짜서 코멘트를 남겼다. 감정적으로 쓰지 않고 이건 좀 인터레스팅 하다고만 했다.
반나절이 채 안되어 댓글이 달렸다. 알려줘서 고맙다고, 링크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면서 한글판으로 들어가는 링크를 걸어주었다. 대댓글의 링크를 타고 설문조사에 답했다. 대중교통, 자전거, 전기차, 자율주행차 등에 관한 선호를 포함해서 묻는 게 많았다. 고맙다, 덕분에 설문조사 참여할 수 있었다고 댓글에 덧붙였다. 신속한 응답에 기분이 좋았던 게 사실이니까.
나오면서 한번 더 광고를 클릭했다. 어라, 여전히 스페니쉬 버전으로 넘어간다. 인트라넷 상의 한글 서브페이지는 분명히 있는데 웹과의 링크까지는 제대로 잡지 못했구나. 링크는 여전히 안된다고 귀뜸 댓글을 얹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알아보겠다는 답이 왔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제대로 한글 설문으로 넘어간다.
세상 너무 쉽게 산다고 아내한테 종종 한소리 듣지만 나도 나름 깐깐할 때가 있다. 그게 사소한 데 꽂혀서 그렇지 나 쉬운 사람 아니다. 그렇다고.
<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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