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데이(노동절)’는 쿠바 공화국 최대 국경일이자, 쿠바 혁명정신을 북돋우는 세계인의 축제일이다. 1959년 1월 혁명을 완수한 인권변호사 출신 혁명군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는 총리 신분이던 1961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식 연설에서 비로소 자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자임을 공식 천명했다.
“미국의 케네디(당시 대통령)가 사회주의를 싫어한다면 우리는 제국주의를 싫어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날 쿠바는 다당제 선거를 금지함으로써 일당 체제를 선언했다.
미국과 쿠바가 혁명 직후부터 서로 으르렁댄 건 아니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는 쿠바 혁명정부의 좌파 성향을 우려하면서도 당장엔 쿠바에 투자된 미국 자본과 이권을 더 염려했다. 미국은 쿠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바티스타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민주주의 혁명이길 바랐다.
물론 그 기대는 카스트로의 토지개혁과 정유공장 국유화 등 일련의 조치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카스트로는 미국 수입품 관세를 인상하고 소련과의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 아이젠하워는 쿠바 설탕수입 쿼터를 삭감하고 미국 내 쿠바 자산 동결과 함께 사실상 거의 전면적인 대쿠바 무역금수조치를 단행했고, 케네디는 61년 4월 피그스만 침공을 감행했다. 카스트로의 메이데이 선언은 미국에겐 냉전 선전포고였지만, 쿠바로선 15세기 이래 이어진 스페인-미국 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 선언이었다.
1989년 냉전 종식으로 구소련 지원마저 끊기면서 이후 쿠바는 현대사 최장 기간 미국과 유엔의 초고강도 경제제재에 갇힌 고립의 섬으로 버텼다.
전 세계 진보-좌파 청년 및 노동-인권 운동가들이 메이데이에 맞춰 쿠바를 방문, 다양한 행사에 동참하며 쿠바의 노동자 및 시민들을 응원했다. 그들은 스페인 내전 국제여단의 이름을 빌려 스스로를 ‘우정의 여단’ ‘벤세레모스 여단(Venceremos Brigade)’ 등으로 명명했다. 벤세레모스는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쯤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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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 한국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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