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되면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내 또래들이 폼잡으려고 외우던 문장들이 있다. 조숙했달까, 몇몇 애들은 영화 러브 스토리에 나오는 대사를 외웠다.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사랑은 절대로 미안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건 발랑까진 소수였고 대부분의 중학생이 인생 좌우명으로 가슴에 새긴 문장은 교과서에 실린 이 말이었다. Boys, be ambitious!
소년이여, 야망을 품어라!
야망도 그렇지만 나는 소년이라는 그 단어에 꽂혔다. 더이상 어린이가 아니고 소년이 된 나. 막상 영어의 보이는 국민학교, 중고등학교를 가리지 않건만.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국어시간. 소년이로학난성하니 일촌광음불가경이라. 한문시간.
그렇게 내게 소년시대를 열어준 이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한다. 클라크 학장님.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William Smith Clark)의 이 명언은 막상 미국에 와보니 별반 들을 일이 없다. 일본에서 유독 사랑받는 문장이고 그 영향이 70년대 초 한국에 남아 있던 것. 그가 신설 삿포로 농학교, 지금의 홋카이도대학에서 초대 교두로 학생들을 가르친 기간은 1876년에서 이듬해까지 8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짧지만 그 발자취는 길다.
매사추세츠 출신인 그는 독일에서 박사를 받고 모교인 애머스트에서 교수로 가르치던 중 농업대학 설립에 나섰다. 매사추세츠는 동부 해안을 따라 상공업이 발달해서 부를 누렸지만 서쪽 산기슭 농촌 지역은 그렇지 못했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과학기술의 성과를 농업에 접목할 고등교육 기관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대학을 인문학 중심의 고상한 상아탑으로만 여겨온 풍조를 감안하면 꽤 진보적인 발상이었다. 여론은 반신반의, 그 필요성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유지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헤치고 매사추세츠 농업대학을 세워 학장으로 이끌던 그를 메이지 유신 이후 북해도, 홋카이도 개척에 들어간 일본이 주목했다. 러시아의 남진에 대항하는 홋카이도 개척은 아이누 원주민을 강제로 밀어내며 군사적으로 전개되었다. 직업군인으로 개척을 지휘한 구로다 기요타카는 초빙 온 이 미국학자에게 예외적이다 싶게 큰 재량권을 허용했는데 이는 참전용사 출신인 클라크와 죽이 맞아서다.
강력한 유니온 지지자였던 젊은 날의 클라크 교수는 남북전쟁이 벌어지자 학생들로 의용군을 꾸려 참전했다. 현장 지휘관으로 숱한 전투를 치르고 남군의 대포를 최초로 포획하는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폭풍우 치는 숲속 전투에서 그만 대열에서 낙오가 되기도 한다. 전사로 처리된 상황에서 나흘을 홀로 숲속을 헤맨 끝에 본대를 찾아와 다시 한번 영웅이 된다.
그가 헤맸던 그 숲지대가 바로 여기 이 동네의 섄틸리다. 챈틸리인지 섄틸리인지 발음도 까리한 이 지명은 프랑스 파리 근방의 성인데 이곳에 있던 농장의 건물에 가져다 붙인 것이다.
애초의 이상과는 달리 참혹한 전쟁의 현실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클라크 대령은 군문을 떠나 고향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예비군 훈련장에서 흔히들 그러듯이 구로다와는 신나게 침 튀겨가며 왕년의 영웅담을 나눴던 게 아니었을까.
기독교 선교행위를 철저히 금했던 시절인데 클라크는 윤리교육이라고 둘러대서 성경을 가르쳤고 당국은 그걸 용인했다. 그렇게 1기 학생들에게 개신교가 관심을 끌었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품어라. 부귀 영화 명성 말고 인간됨의 성취에 야망을 품어라. 그렇게 고별사를 남기고 클라크 선생님은 떠났지만 그가 뿌린 씨앗은 2기 학생들에게 전해져 열매를 맺었고 일본 개신교의 모태가 되었다. 그 무리에 우치무라 간조가 있고 또 함석헌 선생으로 이어지니 우리로서도 기억함직한 이름이다.
<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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