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은 인천상륙작전이 75주년을 맞는 날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지휘를 받는 미10군단, 국군, 경찰, 재일학도의용군 등 4만 명 병력이 한반도 옆구리를 강타해 상륙 13일 만에 서울을 탈환한 승전 기록이다. 낙동강 교두보(한반도 면적 10%)를 근근이 사수하며 패전 직전까지 몰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이 작전으로 단숨에 전세를 뒤집고 북진 채비를 갖춘다.
■ 전쟁사에서 상륙작전의 대명사는 단연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1944년 6월 6일)다. 그러나 ‘인천’은 ‘노르망디’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훨씬 더 신속한 성과를 냈다. 연합군에게 노르망디에서 파리까지 가는 길은 80일에 걸친 길고 힘든 여정이었으나, 유엔군의 인천 상륙은 한 번의 멈춤도 없이 작전 목표(서울)까지 직진해 수도를 되찾은 기습 상륙의 모범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군사적 천재성”(역사가 맥스 헤이스팅스)이 높은 평가를 받았고, 맥아더 개인에겐 “미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인이 인생의 정점을 찍은 순간”(로턴 콜린스 장군)이었다.
■ 인천도 이야깃거리가 많지만 노르망디만큼 주목받진 못했다. 지난해 노르망디 80주년 행사에선 미 의원들의 공수낙하, 승전국(미영프)과 패전국(독) 정상 참석, 군사 마니아들의 상륙 재연행사 등 여러 국제 이벤트가 이어졌다. 반면 인천시는 75주년에 미 대통령 등을 초청하며 국제행사를 꿈꿨지만 바람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이어서다. 2차대전처럼 통쾌한 승전이 아니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무승부일 뿐이다.
■ 그렇다고 우리마저 6·25와 인천의 의미를 낮잡아 볼 필요는 없다. 서울에서 더 오래 인공기가 휘날렸다면, 서울시민이 겪을 고충은 훨씬 컸을 것이고 인민군 방어는 더 단단해졌을 것이다. 상륙이 미국 주도였고 병력도 대부분 미군이었지만 한국의 기여(해병대, 해군첩보부대, 카투사 등)가 적지 않다. 꼭 미 대통령 참석 행사가 아니더라도 호국의 가치와 평화의 소중함 등 우리끼리 새길 것이 많은 역사의 이정표다. 이번 주부터 인천 전역에서 공연, 축제, 퍼레이드 등 28개 행사가 펼쳐진다.
<이영창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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