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인왕산에 비 온 뒤 맑게 개다) 국립중앙박물관
한 여름 비가 개니 곡운(谷雲)이 가득한데
인왕의 억센 바위 정기를 뿜어낸다
계곡을 채운 운무(雲霧) 하늘 향해 올라가고
호랑이 울음소리 바위산 들썩이네
계곡 사이 흐르는 물 모두 모여 흘러가니
한강의 맑은 흐름 쉬임 없어라
산기슭 누가(累家)에서 책 읽는 소리
이 민족 이끌어갈 인재 난다네
가로 138cm, 세로 79cm에 달하는 비교적 큰 화폭에 담긴 <인왕제색도>는 겸재 정선이 76세에 그린 최고의 걸작으로 조선시대의 회화를 대표하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정수(精髓)이다. 한여름 폭우가 내린 후 비가 개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인왕산의 웅장한 모습과 그 계곡에 낀 안개구름이 천천히 계곡을 타고 오르는 모습, 폭우가 내린 후 계곡에서 쏟아지는 세 줄기의 폭포, 산기슭에 있는 기와집과 그 주변의 울창한 버드나무, 소나무 숲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미술품 수집가였던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소장하고 있다가 1970년대 초에 삼성가(三星家)로 매각되었고, 2021년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여 현재 국보 제 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인왕산의 바위는 흰빛을 띠고 있으나, 겸재는 비에 젖은 바위의 명암을 뒤바꾸는 독창적인 발상으로 흰빛의 바위를 짙은 검은색으로 수직준(垂直皴-붓을 세워 거칠고 힘차게 내려긋는 기법)과 부벽준(斧劈皴-도끼로 찍은 듯한 붓의 기법), 미점준(米點皴-쌀알 모양의 점을 찍는 기법)을 사용하여 본래의 바위가 주는 육중하고 강한 느낌을 더 강렬하게 부각시켰다. 진한 먹의 깊이,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중후한 공간감과 실체감에서 겸재의 천재성이 돋보인다.
이 그림은 검은색 바위의 웅장함이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면서도 계곡의 운무에 의해 순화(純化)되고, 소나무와 버드나무에 둘러싸인 집에서 선비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강함과 부드러움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그림 속의 인왕산 꼭대기에는 한양 도성의 성곽과 키작은 소나무들이 깨알같이 그려져 있는데 오늘날 인왕산에도 이 소나무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인왕산 주봉(主峯)의 윗부분이 조금 잘려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이 표구과정에서 훼손된 듯하다. 인왕산 정상이 그림에 포함되어 있어 산 위의 하늘까지 볼 수 있었다면 이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더욱 컸을 것이다.
조선후기의 학자인 심재(沈梓, 1722-1784)는 그의 저서 <송천필담(松泉筆談)>에서 겸재의 기운생동(氣韻生動)한 그림에 대해 “건장하고 웅혼하며 끝없이 넓고 원기 왕성하다(壯健雄渾浩汗淋리/장건웅혼호한임리)”라고 평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평생을 인왕산 기슭에 살며 인왕산을 보아왔던 겸재가 그 마음 속에 새겨진 인왕산의 정기를 말년에 화폭으로 표현한 위대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겸재는 절친인 사천 이병연이 병석에 누워있을 때, 인왕산 기슭에서 함께 성장하며 벗했던 그를 위해서 이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전해진다. 폭우가 내린 인왕산에 비가 그치고 안개가 계곡 사이를 서서히 올라가며 사라지듯 친구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겸재의 다정한 마음이 담겨있다.
이 그림을 구입해 나라에 기증함으로써 전 국민이 볼 수 있게 한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이 명화를 후손에게 남겨준 겸재 정선 선생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joseonkyc@gmail.com
참고: 이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전시회
Korean Treasures: Collected Cherished, Shared (Nov. 8, 2025-Feb. 1, 2026), Arthur M. Sackler Gallery, Washington, D.C.
<
최규용 교수 (메릴랜드대 화학생명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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