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도 얼굴이 있다. 나이테는 나무의 세월을 말해 주고, 껍질의 주름은 고난과 계절을 품고 있다. 어떤 나무는 바람에 깎여 거친 얼굴을 하고 있고, 정원의 나무들은 단정하고 깔끔하다. 나무의 얼굴은 늘 말이 없지만, 그 속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나는 오래전에 이야기 하는 나무를 만났다.
모스크바 공항을 벗어나 시내로 이어지는 길은 하얀 자작나무 숲이었다. 누가 저렇게 많은 나무에 흰 페인트 칠을 했을까? 나무는 이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하얀 얼굴과 매끈하고 곧은 몸매로 하늘을 탐내며 똑바로 서 있었다. 그 곳은 눈이 쌓여 있어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나무인지 알 수 없었다. 닥터 지바고의 설국이 보였다. 광활한 설원, 얼어붙은 사면, 고요 속을 한 여인이 조심스레 걸어가고 있다. 모자를 깊이 눌러 쓴 그녀의 외투 끝이 바람에 떨렸다. 나는 지바고와의 사랑을 더듬는 라라의 눈빛을 잠시 떠올렸다.
창 밖을 내다보자 또렷한 나무의 얼굴이 낯선 이방인들을 맞이했다. 자작나무의 얼굴은 창백하면서도 무표정 했으나 냉랭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만나는 공산국가의 두려움을 덜어 주었다. 차는 달리고 또 달렸으나 도시의 기척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창 밖에는 여전히 같은 얼굴의 나무들이 따라왔다. 낯선 땅에서 사람들 보다 먼저 우리를 맞아준 존재가 나무들이라는 사실이 신기했다. 언어도 다르고 표정도 낯선 땅에서 나무의 얼굴은 오히려 익숙하고 편안했다. 멀리 집들이 하나 둘 보이고 사람 사는 기척이 느껴지자 비로소 나무 행렬은 끝이 났다. 공산국가를 처음 밟는 두려움, 자유를 잃은 땅이라는 막연한 불안이 마음을 짓눌렀다. 나무의 얼굴은 마치 나 대신 두려움을 짊어진 듯 파리했다. 모스크바의 첫인상은 도시도, 사람도 아니었다. 그 것은 공항에서 집이 나타나기까지 나를 따라오던 자작나무의 얼굴이었다.
자작나무의 얼굴은 계절과 시간을 넘어 이제도 그 때를 생각하게 한다. 그 날 나무의 얼굴은 누군가의 길을 지켜주는 조용한 빛이라는 것을 알게 했다. 가늘고 길게 오르는 자작나무는 맑은 마음으로 따뜻한 사람들을 기다리며 살아 왔기에 희고 고운 피부가 되었나보다. 우리가 만난 자작나무는 깊고 멋진 존재감을 보여 주었다. “여기는 너무 추워요. 게다가 흰옷을 입고 있으니 더 추워요. 우리 안에는 오랫동안 차가운 수액이 흐르고 바람이 불면 우리 잎들끼리 사락 사스락 서로를 응원해요. 눈이 산처럼 많이 쌓여도 얼어 죽은 나무친구는 없어요. 겨울을 참고 서 있어야 화사한 봄을 만날 수 있어요. 찬란한 여름도 화려한 가을도 고요한 겨울도 다 지키고 있답니다. 가끔은 따뜻한 남쪽으로 가고 싶어요.” 추위를 이기려 바짝바짝 붙어 있는 나무 떼가 바람을 타고 자작거렸다. 나는 문득 나무 줄기를 여름의 초록으로 칠 해 주고 싶었다. 창백하지 않은 생기를 주고 싶었다.
나무가 보여주는 얼굴은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시간을 살아낸 한 존재의 초상이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그 길 위에 자작나무들이 서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모스크바의 겨울은 멀리 떠나갔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 마주한 차창 밖의 하얀 자작나무들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있다. 하얀 눈과 함께 내 마음속 깊은 곳에 한 폭의 풍경화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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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숙 시인·수필가 미주문협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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