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타임이 풀리자 그림자도 서둘러 돌아왔다. 창가에 햇살이 짧게 머물다 스러지는 끝에 겨울 모서리를 생각한다. 겨울 모서리는 찬바람이 서서히 스며들어도 아직 따뜻함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시간의 경계다.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겨울 모서리는 시간이 멈춘 듯 서늘하다. 설산에 쌓인 그리움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히로코가 눈 덮인 산속에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다. “오겡키데스까?” 그 외침은 눈밭으로, 하늘로 흩어져 날리고 부서진다. 죽은 이를 향한 인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모습이다.
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는 약혼자 ‘후지이 이츠키’를 산악 사고로 잃는다. 그의 2주기 추도식 후, 히로코는 우연히 졸업 앨범에서 이츠키의 주소를 발견하고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편지가 ‘후지이 이츠키’라는 여성에게 도착한다.
그 여성은 후지이 이츠키의 고교 동창으로 이름이 같았다. 약혼자 이츠키는 여자 이츠키를 꼭 닮은 히로코를 만나 약혼까지 한 것이다. 히로코와 여자 이츠키는 편지를 주고 받는다. 두 사람의 편지는 과거로 향하지만 답장은 현재로 돌아와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사람의 편지에는 눈 내린 거리, 학교 교정, 희미한 햇살, 글을 쓰는 손의 떨림을 겨울 모서리에 가져다 놓았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두 사람이 마주하지 못한 채 교차하는 순간이 ‘겨울 모서리’다. 그 모서리에서 나는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희미한 떨림을 느낀다.
히로코는 죽은 약혼자 이츠키와, 여자 이츠키의 추억을 마주하게 된다. 히로코는 잃어버린 사랑의 조각들을, 여자 이츠키는 잊고 있던 추억의 단편들을 다시 꺼내게 된다. 히로코는 서서히 과거의 상실에서 벗어나고, 여자 이츠키 역시 오래 전 자신이 몰랐던 첫사랑의 기억을 되찾는다. 히로코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그 소녀를 몰래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히로코는 약혼자 이츠키를 잊기로 마음 먹는다. 히로코는 눈 속에 묻힌 약혼자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허공에 그리움을 쏟아 놓는다.
영화 속 끝없이 펼쳐진 설원처럼 나의 마음에도 눈이 내리고 있다. 설산을 향해 외치던 “오겡키데스까?”는 결국 나 자신을 향한 인사였다. 눈 속에서 흩날리는 목소리는 닿지 않지만, 그리움은 공기 속에 오래 남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흔들어 놓고 이별, 기억, 사랑의 잔향을 남긴다. 그 짧은 인사 속에는 이미 수많은 시간의 눈이 쌓여 있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이 떠오를 때, 그 때는 아마 겨울 모서리쯤 이려나?
나는 겨울 모서리에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의 겹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본다. 우리는 매 순간 조금씩 사라지고, 조금씩 새로 태어난다. 우리의 내면이 모서리에 조용히 닿아, 추위에서 따뜻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끝에서 시작으로 봄을 향하여 호흡을 시작한다. 그래서 겨울 모서리는 끝난 사랑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기억의 경계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그곳에서, 나는 사라진 것과 남아 있는 것의 경계를 본다. 겨울 모서리의 끝에서, 나도 조용히 대답한다.? “응, 나는 괜찮아.” 겨울의 모서리는 그렇게, 기억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되묻는 시간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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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숙 시인·수필가 미주문협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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