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폭동 후 1992년 젊은 한인 변호사들이 첫 토요상담 시작”

정상기 킹카운티 판사가 지난 19일 워싱턴주 한미변호사협회 연례만찬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워싱턴주 한미변호사협회(KABA)가 지난 19일 시애틀 페어몬트 올림픽호텔에서 개최한 제35회 연례만찬에서 킹 카운티 정상기 판사가 전한 기조연설이 큰 감동과 울림을 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 판사의 기조연설은 화려한 수사보다도 진솔한 고백과 다짐으로 청중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이 자리에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며 소탈하게 운을 뗐지만, 곧 30여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며 한인 법조인 공동체의 시작과 그 의미를 되새겼다.
그가 강조한 핵심은 단 하나였다. “우리가 받은 것을 커뮤니티에 돌려줘야 한다”는 책임과 소명이었다.
1.5세대의 자각…“우리는 빚을 진 세대”
한국에서 태어나 12살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자신을 ‘1.5세대’라 소개했다. 1세대 부모들의 희생과 고단함, 그리고 2세대의 언어적 자유 사이에 놓인 세대.
그는 뉴저지에서 자라 시애틀로 온 뒤 한인 신문을 구독하며 커뮤니티 소식을 접했고, 그 과정에서 한인 사회가 겪는 수많은 법적 문제를 목격했다. 영어와 제도를 잘 모르는 이민자들이 사기 피해를 당하거나, 부당한 계약과 분쟁에 휘말리는 현실.
교회에서 변호사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실상 매주 찾아오는 이들의 상담 요청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이 일은 제 전문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실망과 절박함이 담긴 얼굴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언어 능력과 법적 지식은 개인의 성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를 돕기 위해 쓰여야 할 책임이라는 사실을.
1992년, 결단의 시간
1992년 4월 29일 LA폭동은 한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옥상에서 가게를 지키던 한인 상인들의 모습은 전국의 한인들에게 깊은 상처와 동시에 각성을 남겼다.
“우리 커뮤니티가 너무 고립되어 있지 않았는가.”
“전문직에 오른 젊은 세대가 과연 충분히 돌려주고 있었는가.”
이 질문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이동훈 변호사 등 몇몇 젊은 한인 변호사들이 모여 무료 법률 상담을 시작했다. 1992년 6월 6일, 첫 토요일 상담이 열렸다. 한인 신문에는 “젊은 변호사들이 바쁜 일정을 뒤로하고 커뮤니티에 봉사한다”는 제목이 실렸다.
그 작은 시작은 점점 확장되었다. 더 많은 변호사들이 참여했고, 킹카운티 법률 자료를 한국어로 번역해 배포했으며, 보험 사기 등 커뮤니티 내부의 문제에도 목소리를 냈다.
그는 “우리는 완벽하지 않았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재능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프로보노가 준 진짜 보상
정 판사는 이후 판사로 임명되어 12년 넘게 법정에 섰다. 수많은 사건과 인생의 갈림길을 지켜보며 그는 한 가지를 확신하게 됐다.
사람들은 단순히 ‘행복한 직장’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 연구를 인용하며, 많은 이들이 더 높은 연봉보다도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환경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고 말했다. 정 판사는 “진정한 충만함은 서로의 삶을 나누는 데서 온다”고 고백했다.
프로보노(법률적인 도움) 활동은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과 연결하는 과정이다. 법률 지식, 언어 능력, 분석력은 누군가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는 후배 법조인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력서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의미를 찾기 위해 프로보노를 해보십시오.”
나눔이 조직을 키운다
정 판사는 조직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직함이나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보인다고 했다. 가족, 공동체, 그리고 함께 나눈 시간들.
“우리가 35년 전 모였을 때, 우리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는 이 정신이 계속 이어질 때 조직은 더욱 성장할 것이며, 커뮤니티 역시 단단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받은 것을 돌려주는 삶”
연설의 마지막에서 그는 조용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청중에게 묵직한 질문을 남겼다.
“당신은 무엇을 돌려줄 것인가?”
이민 1세대가 흘린 땀 위에 세워진 오늘의 자리. 그 위에서 성공을 누리는 세대라면, 이제는 차례가 돌아왔다.
정상기 판사의 기조연설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책임의 선언이었다.
받은 것을 돌려주는 삶.
그것이 개인의 성공을 넘어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라는 메시지가 깊은 울림을 남겼다. <황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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