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 카운티
▶ 남부 채소, 북서부 리마콩, 중부 오렌지 재배
1920년도 오렌지카운티 인구는 6만1,375명이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백인으로 구성된 카운티는 끈끈한 유대감과 인정이 넘치는 전형적인 목가풍의 살기 좋은 지역이었다.
라구나니겔 국립문서국은 1920년 센스서 자료를 72년간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지난 1992년에 공개된 카운티 센서스 통계를 바탕으로 레지스터지는 그 당시 센서스 자료에 이름이 오른 사람을 만나, 그들로부터 80여년 전의 카운티 생활상을 전하고 있다. 연방 정부는 1790년부터 센서스를 시작했으며 1920년 센서스는 14번째가 되는 셈이다.
리오 보디노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새들백 마운틴 기슭에서부터 펼쳐지는 콩밭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바인 채프만은 센서스 요원이 플러턴 소재 오렌지 농장을 방문, 가족 17명의 인적 사항을 물었을 때 9세였으며 지금도 그 당시 오렌지꽃 향기가 나는 듯하다. 그의 부친 찰스 채프만은 발렌시아 오렌지 재배방법을 개발, 오렌지카운티를 오렌지의 명산지로 격상시켰으며 초대 플러튼 시장을 역임했다. 또 채프만 대학을 설립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기도 했다.
1911년 2월14일생인 어바인 채프만은 그 당시는 카운티는 북쪽의 라하브라로부터 남쪽의 라구나까지 모두 하나였다며 주로 남부는 채소, 북서부는 리마콩, 중부는 오렌지를 재배했다고 회고했다.
1920년 샌타애나에서 태어나 현재 엘토로에 거주하고 있는 조지 오스터만은 정오에 샌타애나의 4가와 메인 스트릿에 나가면 세상에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가깝고 협동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그 당시 좀 외딴 지역으로 느껴지는 새들백 밸리에서는 강건한 농부들이 계곡에서 일하고 아이들은 말을 타고 학교에 가곤 했다. 238명의 주민들은 오후에는 오스터만 가게에 종교적으로 만나 우편물도 가져가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20년대 카운티 경제는 농작물의 가치가 2배로 증가하는 등 발전하기 시작했으나 시골생활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재즈음악 시대에 그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라디오를 소유하고 있거나 LA행 열차 티켓을 구입할 수 있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당시 사람들 중 카운티가 80여년이 지난 지금 인종적으로 매우 다양한 인구 300만에 육박한 하이텍 중심지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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