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4년 미주지역에 처음으로 가정법률상담소가 문을 열었을 때 고 이태영 박사가 하신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번민하는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이 상담소의 모토입니다”
오렌지카운티 애나하임의 허름한 상가건물에 손수 간판을 다시며 몇 차례나 이 말씀을 강조했다. 이웃의 고통이 내 아픔으로 다가올 때 비로소 상담이 결실을 맺는다는 설명도 곁들이셨다.
모든 게 처음이어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3개월 후엔 사무실을 마련하여 LA로 상담소를 옮길 수 있었다. 한국에서 양정자 박사가 파견돼 기틀이 잡혔고 평생회원도 꾸준히 늘어나면서 점점 자립이 가능해졌다. 당시엔 복사기나 타자기 등 사무기기는 거의 모두 중고품을 기증받아 사용했다. 돈주고 새 물품을 구입한다는 건 생각조차 못했다. 고통받는 내 이웃을 생각해 모든 걸 아끼며 쪼개서 그야말로 알뜰살림을 꾸몄다.
예산이라고 해야 별 게 없었다. 이사회비와 평생회원들의 도네이션, 광고주들의 협조가 수입의 전부였다. 그래도 부족하면 이사들이 자원봉사로 나서서 모두 한마음으로 일했다. 지금처럼 연간예산이 100만달러가 넘는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1.5세와 2세들이 살림을 맡아 이 정도로 커졌으니 이들의 공은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다. 창립회원이자 이사장을 지낸 본인으로서는 이들의 활동이 대견스러울 뿐이었다.
그런데 상담소가 재정난을 이유로 느닷없이 한인청소년회관(KYCC)과의 합병을 고려한다는 소식이다. 당혹감은 물론 적잖은 배신감마저 든다. 어떻게 이런 사태에 이르렀을까. 근본적으로 이민 1세와 1.5·2세의 가치관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상담소의 주 타겟은 이민 1세 여성들이다. 상담소가 청소년회관과 합병된다면 1세 기관으로서의 성격은 흐려진다. 아무리 한국말이 능숙하더라도 성장배경과 문화가 다른 2세들이 1세 여성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헤아리기는 어렵다고 본다. 고 이태영 박사의 말씀대로 ‘이웃의 고통이 내 아픔’으로 다가오지 못한다면 상담소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것은 뻔한 노릇이다.
한인단체들도 성격에 따라 1세가 맡아야 할 것이 있고 1.5·2세가 앞장을 서야할 곳이 있다. KYCC와 같은 단체는 한인청소년들을 이해하고 지도할 수 있는 1.5세가 맡아 하는 게 당연하다. 한인들의 정치력 신장을 도모하는 한미연합회(KAC)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는 뒤에서 이들의 활동을 격려하고 재정적으로 도와주는 게 순리일 것이다.
상담소는 그러나 이들 단체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민사회에서 가정과 가족 구성원간의 문제로 고통받는, 한국말을 하고 한국에서 교육받고 한국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민 1세들을 위한 단체이다. 1세가 맡아 운영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여기에 주류 사회 사정에 밝은 1.5·2세들이 뒤에서 정부 그랜트와 같은 기금조성 일을 맡아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어렵사리 뿌리 내린 상담소가 운영난을 이유로 통합흡수, 합병이라는 편한 길을 택한다면 번민하는 우리 이웃은 더욱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이민 1세들에게 꼭 필요한 기관인 가정상담소는 존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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