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리 가정에서 자란 공손하고 수줍은 소년이 어떻게 5,500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량 학살자가 될 수 있었는가. 한달 전 사상 최악의 테러행위를 감행한 19명의 자살 테러범 중의 주모자로 지목된 모하메드 아타는 고향 이집트와 유학지인 독일에서 총명하하고 성실하며 꼼꼼한 청년이라는 평을 받았던 인물이다.
테러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절망적인 환경에서 자란 교육받지 못한 청년들이 자살 테러범으로 나섰던 과거 테러사건과 달리 9·11테러는 이와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감행했다고 지적한다.
현대화된 가정에서 엄격한 변호사 아버지와 애지중지하는 어머니아래 자란 아타는 서구문명과 종교적인 근본주의 사이의 내적 갈등을 겪으며 성장했고, 이 때문인지 서로 상반되는 대조적인 성향을 보였다.
아타는 대학생이 될 무렵까지 어머니 무릎 위에 안겼을 정도의 ‘마마보이’로 어머니와 두 누나를 극진하게 사랑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내가 소심한 아들을 응석받이로 키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아내에게 "아들을 딸처럼 키운다"며 "우리 집에는 딸이 셋"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아타를 접한 사람들은 그가 "여자들은 신앙심이 부족하다"며 무례할 정도로 기피했고, 독일 대학에서 졸업 논문이 통과됐을 때에도 여교수와 악수를 거부했다고 말한다.
각각 교수와 의사인 두 누나처럼 대학과 유학이 당연했던 아타는 아버지의 뜻대로 공학자가 되기 위해 공부에 열심이었고, 90년 카이로 대학을 졸업했을 때에도 어머니와 두 누나와 헤어지기 싫었으나 아버지의 명을 따라 독일 함부르크에 도시계획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가게 됐다.
아타의 아버지에 따르면 81년 안와르 엘-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되고 이집트가 분쟁에 휩싸였을 무렵부터 당시 12세이던 아타가 진지하게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타는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충고한 대로 정치를 기피했다. 당시 대학 농구팀에 가입하지 않은 것도 회교 정치단체에서 팀을 조직했기 때문이었다.
아타가 과격 근본주의로 돌입한 것은 독일유학시절부터다. 함부르크의 아랍계 이민 커뮤니티에서 새 보금자리를 찾은 그는 엄격한 회교 관습을 준수하며 미국이 이슬람의 원수라고 자주 설교하는 모스크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측이 기도모임을 위해 장소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중퇴하겠다"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독일에서 그를 안 사람들은 아타가 이슬람교 근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턱수염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시무룩하고 진지해졌다고 회상했다.
아타는 97년 말부터 99년초 사이 독일에서 자취를 감췄는데 수사관들은 이때 아타가 오사마 빈 라덴의 아프가니스탄 훈련 캠프장에서 테러리스트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99년 8월 독일에서 학사과정을 급히 마친 후 수염을 깎고 뉴저지 뉴왁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 다음 15개월 동안 미국을 두루 다니며 세기의 테러를 철저하게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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