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정부청사들이 밀집돼 있는 베를린 시내 빌헬름가 인근의 ‘독일총리 정원’ 지하에 벙커가 하나 있다. 콘크리트 벽 두께가 4미터, 땅속으로 15미터를 파 내려간 이 벙커는 나치의 히틀러가 2차대전 때 연합군의 공습에 견딜 수 있도록 구축한 것이다. 패전 후 히틀러는 애인 에바 브라운과 이 벙커에서 자살 후 불에 탄 채 생을 마감했다. 비밀 해제된 KGB 파일에 따르면 소련군이 이 벙커에서 히틀러와 브라운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벙커에 숨어 조여오는 연합군을 두려워하며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 지금 벙커 위에는 어린이 놀이터가 들어섰지만, 당시 히틀러의 참담함은 잔해와 함께 아직도 남아 있다. 전적으로 자초한 일이긴 해도 벙커에 숨어살던 히틀러의 말년은 분명 서글픈 나날이었을 것이다. ‘수족’이 잘린 상태에서 아프가니스탄 남동부 산악지역의 한 동굴 벙커에 숨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오사마 빈 라덴도 비슷한 처지일 게다.
9·11 테러사건 여파로 미국에서도 숨어사는 일명 ‘벙커 신세’가 있다. 딕 체니 부통령은 테러사건 이후 부시 대통령과 동행을 삼가며 모처에 은신하고 있다. 만에 하나 테러로 대통령과 부통령의 신변에 동시에 변고가 발생하면 국정혼란이 야기될 것을 염려해서다. 가끔 모습을 드러내긴 하지만 거의 대부분 외부에서 좀체 감지할 수 없는 곳에서 집무하고 있다. 그래서 그를 두고 ‘벙커 부통령’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스산한 벙커를 전전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싶은 부통령으로서 현 상황이 영 탐탁지 않을 게다. 백악관이 부시 대통령이 주재하는 성탄파티에 ‘예방적 차원’에서 체니 부통령을 일단 참석자 명단에서 제외했다는 후문이고 보니 체니로선 ‘푹 가라앉은 연말’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래도 체니는 미국민이 그의 애국적 열정을 알아주고 또 ‘벙커 생활’도 한시적이니 너무 속상해 할 일은 아니다.
방사능 테러시 가족들이 피할 수 있도록 주차장이나 뒷마당에 벙커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늘어 관련업체들이 흥이 나 있다. 어떤 이는 벙커를 짓느라 집을 저당 잡히기도 했다지만 마음의 평온을 얻었으니 그다지 억울해할 것 없다.
연방이민국이 테러방지의 일환으로 일선경찰도 불법체류 여부를 알아낼 수 있도록 자료를 공유하겠다고 밝혀 한인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한다. "교통법규 위반으로 적발됐다가 혹시 추방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마음이 벙커에 들어가 있으니 연말 분위기가 날 리 만무하다. 올해는 ‘벙커 할러데이’라도 좋으니 새해엔 얼음장 정국이 사르르 녹아 이들이 조바심 내지 않고 살 수 있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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