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인브리지 섬 일본인회의 프랭크 키타모토 회장은 두 살 때 보따리를 잔뜩 이고 진 어머니에 이끌려 세 누이와 함께 페리를 타고 섬을 떠난 것을 아련히 기억한다. 그 배는 1942년 3월 30일 227명의 베인브리지 섬 일본인들을 강제로 실어 수용소로 옮겼다.
그로부터 꼭 60년이 지난 오늘, 이 섬의 일본인 및 미국인 주민들은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내린 일본계 민간인들의 격리명령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은 폐허가 된 당시의 페리 정박장에 비극이 재발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대리석 판의 제막식을 거행한다.
당시 오전 11시3분발 페리를 타고 시애틀에 도착한 일본인들은 먼지가 풀풀 나는 남가주 모하비 사막에 기차 편으로 보내져 그곳의 만자나 캠프에 수용됐다. 워싱턴주 전체에서 1만4천4백명, 서부지역 전체에서는 11만4천여명의 일본인이 이 수용소로 끌려왔다.
키타모토 가족은 다시 만자나에서 남부 아이다호주의 미니도카에 있는 수용소로 옮겨져 3년 이상 생활한 뒤에야 베인브리지 섬으로 돌아왔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섬 출신 일본인 227명 가운데 거의 절반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일본인들은 1800년대 후반부터 베인브리지 아일런드에 정착하기 시작, 주로 딸기농장과 제재소에서 일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 정부는 해군기지가 있는 베인브리지 섬에 거주하는 일본계 주민들을 강제 격리키로 결정했다.
베인브리지 주민들은 일본인회를 중심으로 특별위원회를 구성,‘니도토 나이 요니(재발을 방지하자)’라는 이름의 기념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연방 정부측과 교섭해왔다. 워싱턴 주의회도 이 곳을 사적지로 지정할 것을 부시 대통령과 연방의회에 건의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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