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에게 있어 최대의 고민은 후계자를 어떻게 정하느냐다. 맏아들이 무능력할 경우 둘째나 셋째 아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면 집안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또 창업주는 으레 형제들과 함께 어려운 시절을 거쳐 회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세대교체의 경우 1세대인 삼촌들과 2세대인 후계자 사이에 자칫하면 주도권 싸움이 일어난다. 더구나 성공한 기업에 동업자가 있을 때에는 문제가 위아래로 뿐만 아니라 좌우로 얽혀 복잡해진다. 후계자 문제뿐만 아니라 동업자 문제까지 현명하게 처리하는 재벌이 있다면 그는 기업가가 아니라 예술가다.
요즘 한국 경제계에서 LG그룹의 경영권 재편이 화제다. 55년째 동업해온 구씨와 허씨 가문이 의좋게 헤어질 수 있는 청사진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구씨 쪽에서는 전자·통신·화학·금융, 허씨 쪽에서는 건설·유통·정유 부문을 가질 모양이다.
LG그룹은 럭키금성 그룹으로 부산에서 1947년 럭키치약과 럭키칫솔로 일어선 재벌이다. LG의 첫 시련은 후계자 선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창업주 구인회씨가 1970년 작고하자 동생인 사장 구철회씨(당시 61세)가 후계자가 되느냐 아니면 부사장인 구인회씨의 장남 구자경씨(당시 45세)가 되느냐에 관심이 쏠렸었다. 창업자의 한사람인 삼촌과 2세 조카와의 미묘한 관계다.
이 때 삼촌인 구철회씨가 은퇴를 발표했다. 조카 구자경씨가 잡음 없이 회장자리에 앉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젊은 구자경씨가 취임식장에서 물을 흘리며 삼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한 것은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두번째 깜짝쇼는 2세에서 3세로 경영권이 넘어갈 때 일어났다. 구자경 회장이 95년 명예회장으로의 퇴진을 발표하면서 구태회, 구두회씨 등 1세와 2세 간부들을 불협화음 없이 동반 퇴진시킨 일이다. 이래서 3세인 구자경씨의 장남 구본무씨가 자연스럽게 회장직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재벌규모의 기업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경영권 물려주고 자진 은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친인척 고참들을 설득하여 동반 퇴진하려면 보이지 않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내 친구 중의 한 사람이 몇년 전 LG그룹과 사돈을 맺게 되었다. "재벌의 사돈된 기분이 어떻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걱정했는데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괜찮은 집안이더라"고 대답했다. 뭐가 괜찮으냐고 다시 물으니까 재벌인데도 기강이 엄하고 인화를 제일 중하게 여기는 것에 놀랐다는 것이다. 회장 형제 중에는 아무 일도 안하고 인화를 위해 친척문제만 전담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친인척의 애로사항, 친목모임, 경조관계, 취업 해결 등을 맡고 있으며 메신저와 중개자 역할을 하는 것이 그의 임무다. 또 기강이 엄해 부인들끼리 자주 만나는 것을 환영하지 않으며 경조비도 분수에 따라 내도록 액수가 불문율로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사치한 친척들에게는 경고하고 말들을 옮기지 않도록 신경 쓴다고 했다.
재벌이 1세에서 3세까지 무난히 경영권 인계가 이루어지고 형제간에도 화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수십년 동안 동고동락해 온 동업자와 사이좋게 갈라진다는 것은 양쪽이 인내와 양보 없이는 이루어낼 수 없는 해피엔딩이다.
기업이 덩치가 커지면 가장 골치 아픈 것이 재산분배다. 현대, 삼성, 롯데, 진로, 한화그룹 등이 회사운영권과 재산분배를 둘러싸고 어떤 진통을 겪었는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LG가 이 함정에 빠지지 않은 것은 처음에 1세대가 후계자 문제에서 시범을 보이는 전통을 세웠기 때문이다. 존경할만한 기업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자기 뼈를 깎는 시범을 보이는 사람이다. 리더의 생명은 시범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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