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을 다녀오면서 들은 얘기다. 40대 이상 중 장년층 가운데 지난해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은 “거 봐라”며 냉소적이고, 노무현 후보를 찍은 사람들도 다음 정부를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핵문제가 갈수록 꼬여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경제마저 흔들거리니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이다. 게다가 차기 정부 준비팀들이 불확실성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감을 확대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오는 25일이면 한국에 새 정부가 출범한다. 이름하여 ‘참여의 정부’라고 한다. 하지만 참여의 주체세력이 되어야 할 노무현 지지층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두 가지로 요약해 보자.
첫째,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전통적 한미관계에 틈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대철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새 정부 특사단과 의회 특사단이 잇달아 워싱턴을 방문했지만, 오히려 두 나라의 시각 차가 크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쳤다. 특사단 활동이 외교적으로 미숙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차기 정부가 본질적으로 한미간의 정책 조율을 하려는 의지가 미흡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브라질의 대통령 당선자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는 지난해 12월 중순 정식 취임을 보름여 앞두고 백악관을 방문해 부시 대통령을 만났다. 룰라는 한시간여 정상회담 끝에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당신이야말로, 공화당원이요”라는 흡족한 대답을 얻어냈다.
헤지펀드의 대부 조지 소로스는 사회주의자 룰라가 당선되면 브라질은 파산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국제 자본의 탈출을 선도했지만, 룰라가 워싱턴의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국가 파산을 막았던 것이다. 브라질의 룰라처럼 당선자 신분으로 워싱턴을 방문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일이라고 주장하긴 어렵지만 특사단을 보내 문제 해결하려는 것보다는 적극적인 일임은 분명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 직후 IMF 위기를 맞았지만 다행스럽게 미국에선 빌 클린턴의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덕분에 양국간 정책 조율이 쉬워 미국은 한국 경제를 구했고 한국 정부의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 정부는 햇볕정책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한미간의 틈새가 켜졌다. 문제는 노무현 정부가 추구하는 포용정책이 부시 정부의 북한 포위전략과 너무나 괴리가 크다는 점에서 한반도 긴장 완화의 해법을 찾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차기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차기정부 인수팀이 재벌 개혁을 내세우며 그 로비단체인 전경련과 대결자세를 보이는 가운데 당선자가 노동단체를 찾아 “경제계와 노동계의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겠다”며 친근감을 보인 사실은 가진 자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한국 재벌은 김대중 정부의 대대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지만, 가진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하며 분배에 중점을 두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한국의 종합주가지수가 선거 직후 700포인트에서 13일 현재 575포인트로 가라앉은 것은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 투자자들이 겁을 먹고 빠져나갔기 때문이라는 뉴욕 월가의 지적을 새겨들어야 한다.
가진 자가 돈을 쓰지 않고 빼돌리면 경제가 무너진다. 경제활동에 게임의 룰을 강화하고 거시 경제의 파이를 키우며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지,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는 식의 이분법으로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나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 당선자는 지난 대선에서 박빙의 차이로 승리했다. 그만큼 생각이 다른 사람이 많고, 지지층도 점진적인 개혁을 원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지 세력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정부가 성급하게 모든 것을 달성하려 할 경우 많은 것을 잃을 것임을 역설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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