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이후 한발도 안써…생산업체 1곳 명맥만
과거 ‘공권력의 상징’으로 온 국민의 눈물을 짜냈던 본국의 최루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독재 정권이 지배하고 민주화 운동이 거세던 시절 ‘호황기’를 누렸던 최루탄은 지난 1998년 경찰이 평화 시위 문화 정착을 내세우며 ‘무최루탄’을 천명한 이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한때 10개에 달했던 국내 최루탄 생산 업체는 현재 고려화공 딱 한 곳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80년 이후 민주화 시위가 거세지면서 최루탄 산업은 최고 호황기를 누리며 선두 업체인 삼영화학의 경우 연 매출만 500억 원대를 기록했다.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이 업체를 좇아 10여 곳의 후발 기업들이 우후죽순격으로 등장하며 경쟁이 격화됐다.
그러나 87년 연세대 이한열 씨가 최루탄에 맞아 숨지면서 ‘살인 무기’라는 비난이 거세지고 98년 경찰이 최루탄 사용 금지 원칙을 내세우면서 사정은 급변했다. 99년 대화화공의 최루탄 생산 시설을 인수한 고려화공을 마지막으로 업체들이 도산하거나 생산을 중단했다.
고려화공도 매년 1~2차례 수단 예멘 말레이시아로부터 주문에 대비, 반제품 생산만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고 지난 2년 동안은 아예 물량 주문조차 없었다.
현재 경찰이 보유하고 있는 최루탄은 모두 67만여 발. 최루탄이 가장 많이 사용됐던 87년에 허공에 뿌려졌던 67만여 발과 같은 양이다. 고려화공의 창고에도 다연발 최루탄과 발사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60년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에 처음 등장한 최루탄은 87년을 기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하다가 93년 3만 발, 94년 6만 발, 95년 7만 발, 한총련 사태가 일어나고 화염병 시위가 빈발하던 96년 21만 발 등으로 점증했으나 98년 이후 한 발도 사용되지 않았다.
최기문 경찰청장이 최근 잇따른 파업과 관련, “폭력 시위에 대해 최루탄 사용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는 엄포용일 뿐 앞으로 시위가 격화돼 급박한 상황 진전이 없는 한 국민의 눈물, 콧물을 흘리게 했던 최루탄은 ‘역사’로 남을 전망이다.
박수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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