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따가운 햇볕이 내려 쪼이고 있다. 이런 날 해변 가에서 일광욕이라도 즐기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팔자도 되지 못한 기한은 인종 전시장 같은 풀리 마켓에 좌판을 벌려놓고 손님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좌판이란 말 그대로 우유 통 위에 베니야판을 얹어 놓은 것이다.
그 위에 선글라스, 목거리, 팔지 들이 진열 되어있다. 이런 물건은 흑인, 멕시칸, 인도, 월남 여자들이 잘 사간다고 했다. 여자들이란 몸에 무엇을 걸치고 다녀야 한다. 그 옛날, 더 옛날 남자들이 먹이를 위해 사냥을 나가면 며칠씩 걸렸다. 그때 여자들이 요즘처럼 밖에 나가 일하고, 연속드라마 볼 그런 문명세계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손으로 이것 저것으로 만들어 목에 걸친 것이 오늘날 목거리, 귀걸이와 반지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몸에 새로운 악세 서리는 걸쳐야겠고 돈은 없고 그러니 자연 이런 싸구려 물건을 찾아온다.
기한의 좌판 앞으로 멕시칸이 서툴 대로 서툰 영어로 "하우 마치?" 하고 묻는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를 내 뱉는 것을 보니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트럭 짐칸에 궤짝처럼 포개져 텍사스 국경의 덤불을 넘어온 사람처럼 보였다. 멕시칸의 서툰 영어에 기한도 그만 입이 석고처럼 굳어져버렸다. 그때 옆에 있던 박씨가 "원 포어 디에스, 투 포어 디에시오초" 라고 대신 말을 해주었다. 그때야 기한도 정신을 차리고 잽싸게 거울을 들어 멕시칸 얼굴 앞으로 들어 밀었다. 박씨는 "good! good! pretty good!"을 연발하고 있다. 꼭 자기 물건을 파는 주인 같았다. 작은 키에 꾀나 남루한 멕시칸은 이것저것을 얼굴에 걸쳐보고 있다. 기한은 하나라도 팔기 위해 멕시칸이 새것을 집을 때마다 좋다고 거울을 얼굴 앞에 비추어주기도 한다. 멕시칸은 10불 짜리 한 장을 기한한테 주고 갔다.
박씨는 기한한테 담배를 들이민다.
"장사하는 것 별거 아니라고, 그저 웃어주면서 좋다고만 해주면 되는 거라고."
기한을 위로해 주고 있다. 박씨는 풀리 마켓에서 장사한지 일년이 넘었다고 했다. 나도 일년 정도면 박씨처럼 장사를 잘 할 수 있을까.
기한은 동생을 따라 2주전 처음 이곳에 장사 아닌 장사를 나왔다. 동생이 박씨한테 인사를 시켜 주었다.
"우리형 장사가 처음이니 많이 도와주세요."
그런 당부하는 말에 숫기 없는 멋쩍은 웃음으로 ‘나도 뭘 알아야 도와드리지....’ 하며 쑥스러워하던 박씨였다. 박씨와 인사를 하고 보니 기한보다 한 살 아래였다.
"좌판대 앞에 ‘1for $10. 2for $18.’라고 써서 붙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박씨는 담배를 피우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했다. 기한은 담배를 쭉 발아서 들이마신다. 니코틴이 폐 깊숙이 들어가 번져 가는지 굳어졌던 얼굴이 확 피어진다.
기한은 한국에서 제법 탄탄한 직장에서 생활하다 IMF라는 회오리바람에 실직을 하게 되었다. 50의 고개를 눈앞에 두고 그런 일을 당한 기한은 남은 생이 막막했다. 겨우 받아낸 퇴직금으로 이것을 할까? 저 일을 해볼까? 하다 친구의 소개로 PC방을 했다. 장사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퇴직금과 사채까지 투자한 돈은 어느 구멍으로 다 흘러갔는지 없고 빚만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돈을 갚을 길이 없어 이리저리 피해 다니고 있을 때 미국에 있는 동생한테서 편지가 왔다. 늦게라도 다시 새로운 땅에서 한번 시작해 보자는 각오로 미국에 왔다.
동생의 소개로 밤 청소를 하고 있다. 그 청소하는 일이란 재미도 있지만 한편으로 완전 고립된 생활이었다. 첫째 사람이 말할 기회가 없었다. 집에 오면 다들 나가고 없고 기한은 잠을 자고. 이것은 완전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감옥엔 그래도 동료가 있고 말을 하면서 생활한다. 기한은 언어 장애자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그동안 배운 브로큰 잉글리시마저 말더듬이처럼 생활하고 있다. 이런 큰 땅에서 말도 배우고 무엇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동생과 의논하여 주말 풀리 마켓을 열었다.
"저 여자 한국 사람 같지 않소?"
박씨가 기한이한테 저쪽 월남 사람이 하는 좌판 쪽을 눈으로 가르친다. 기한은 피우던 담배를 버려 발로 뭉개면서 여자 쪽을 바라본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이쪽만 쳐다보고 있는데 혹시 이것 아니요."
새끼손가락을 올려 보여준다.
"글세,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그때 젊은 흑인여자 둘 이가 좌판 앞에 섰다. 기한은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그들이 어떤 물건에 관심을 두고있나 눈치만 살핀다. 한 여자는 팔지를 이것저것 만져보고 팔목에 끼어 보고한다. 한참을 그렇게 하던 두 여자는 팔지 하나씩 사갔다.
"조 기한씨?"
흑인여자들이 돈을 주고 막 돌아설 때 한 여자가 기한을 불렀다. 기한은 돈을 호주머니에 넣다 놀라 좌판 앞에 서 있는 여인을 쳐다본다. 조금 전 이쪽을 보고 서있던 여자였다. 여인은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머리위로 올린다. 순간 기한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
"야! 이놈아, 아주 멀리까지 도망 왔군. 네놈을 잡으려 여기까지 왔다. 여기 사람이 많으니 장사 끝나고 만나자. 당신 집도 알고있어. 이젠 도망 안가겠지."
장 숙희. 기한이 PC방 할 때 돈을 빌려준 여자였다. 돈을 미끼삼아 드럼통 같은 몸통으로 여우꼬리를 흔들던 여자. 언제 저렇게 날씬한 몸매가 되었을까. 내 살기도 힘드는데 어떻게 돈을 갚나. 옛날처럼 도망갈 수도 없고, 어떻게 저 여자의 거물망 안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귀신 곡하겠네. 차라리 몸으로 돈을 갚아 줄까. 기한은 진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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