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오는 소리’에 귀 기울일 틈도 없었는데 달력을 보니 벌써 중순을 지났다. 예전에 친구들과 ‘가을 찾기’를 하던 생각이 난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면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가을이 오고 있음을 증명할 만한 것 열 가지 씩을 모아 엮어내는, 일종의 가을맞이 의식과도 같은 놀이를 즐겼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사춘기 무렵의 여자 친구들 중엔 가을을 앓는 아이들이 많았다. 가을 초입의 들뜬 며칠이 지나면 이내 불면증을 호소하는 친구들이 두셋 나왔다. 오후 늦게까지 혼자서 산책을 하는 친구도 있었고 며칠씩 학교를 결석하던 아이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을이 깊어짐에 따라 말수가 줄어 ‘침묵기’ 라는 별명을 얻었던 수희가 생각난다. 난 가을이 싫어! 그물에 칭칭 감긴 것처럼 몸도 마음도 무기력해져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거든.
반면 나는 가을이면 내 속이 가득 차오르는 충일감에 싸이곤 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의 부신 푸름과 눈이 마주칠 때, 길가 도랑물마저 스스로 몸을 맑히고 흐르는 소리도 한결 깊어진 것을 느낄 때, 그 물에 막 몸을 헹군 듯 서늘하게 색이 바랜 가을꽃이 있는 듯 없는 듯 함초롬히 피어난 길을 걸을 때, 그럴 때면 왠지 ‘생의 안도감’이라고 할 수 있는 조용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이 몸을 감싸곤 했다.
‘결실’과 ‘결별’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가을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색깔을 보여주는 카멜레온과도 같다. 아니, 가을은 그저 묵묵히 한 계절의 소임을 다할 뿐인데 사람이 저마다의 희로애락을 계절의 흐름에 얹어 이런 저런 색으로 덧입히는 것이리라.
그나마도 이젠 장엄하게 익어가는 가을의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해가 다르게 변해가는 기후와 환경 속에서 어쩌면 세상의 모든 가을이 영영 실종되어 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친구들과 ‘가을 찾기’를 할 때 가을을 보여줄 수 있는 열 가지 정도는 금방 찾아냈는데, 이제는 계절과 계절이 구분이 없어지고 인간의 이기심은 가을마저 폐기처분할 지경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잠자리, 귀뚜라미, 코스모스, 산국화... 어느 순간부터 가을지기의 자리에서 밀려난 그리운 이름들을 차례로 입 밖에 내어 불러보며 잃어버린 가을을 애써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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