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향민/ 영어음성학자
며칠 전 백화점 세일에서 구두를 한 켤레 사다보니 구두와 관련한 옛일이 떠올랐다.
오래 전 서울에서 나는 점수라는 이름을 가진 구두닦이 소년을 안 적이 있다.
나는 대학교 1~2학년 때 종로에 있는 한 음악다방을 자주 찾았는데 점수는 그 다방 건물 입구에서 구두를 닦는 소년들 중 하나였다. 나는 당시에 거의 구두를 닦는 적이 없었다. 나이 때문인지 성격 때문인지 반짝거리는 구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 다방에는 13~14세 정도의 소년이 ‘구두 닦어’를 외치며 주문을 받아가곤 했다. 어느 날 예의 그 소년은 구두 닦는 주문을 받으며 다방을 돌다가 내 앞을 지나가면서 “안 닦죠?”라는 의외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날만이 아니라 다음날도 계속했다. 나는 뭔가 그 소년한테 빚을 진 듯한 혹은 한방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루는 작심하고 소년을 기다렸다. 소년이 그 날도 “안 닦죠?” 라며 지나갈 때 “야 꼬마야”라고 불러 세웠다. 소년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나는 소년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당황해 하는 소년에게 나는 우유 한잔을 주문해 주며 마시라고 했다. 그리고는 내가 구두를 닦지 않는 것은 반짝거리는 구두를 좋아하지 않아서라고 설명을 하며 너를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니 소년은 몸둘 바를 몰라했다.
나는 그때 소년의 이름이 점수인 것을 알았다. 이후부터는 점수는 내 앞을 지나갈 때 수줍어하며 고개 숙여 인사만 하고 지나갔다. 어느 날 저녁 무렵 다방을 나서는데 누가 불러서 돌아보니 점수가 웃으며 서있었다. 나는 안 가겠다는 점수를 데리고 뒷골목 포장마차로 가서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주었다.
그 날 점수로부터 들은 점수의 인생은 짧지만 간단치가 않았다. 점수는 전라남도 한 빈촌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삼촌과 동거를 했으며 그 둘의 구타에 못 이겨 기차를 집어타고 무작정 서울을 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소매치기 두목한테 잡혀 소매치기를 배우게 되었으나 겁이 나서 할 수가 없어 도망을 쳤다고 했다.
이후에도 우리는 몇 번 더 함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점수는 내게 오더니 갑자기 내 구두를 벗기고는 돈을 내 주머니에 넣으며 자기가 구두를 갖고 오면 이 돈을 요금으로 자기에게 다시 주라며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얼마 후 눈이 부시게 반짝거리는 구두를 들고 나타나더니 구두를 신겨주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나는 다시 점수를 볼 수 없었다. 궁금해서 동료 구두닦이 소년에게 소식을 물었다. 그런데 대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바로 내 구두를 닦아주던 날 밤 점수는 매상의 일부를 갖고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날 억지로 구두를 닦아준 것이 나에게 주는 이별의 선물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아쉬움이 컸다. 비록 점수의 선물은 금전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나 오랫동안 가슴 찡한 선물로 기억되고 있다.
선물이란 하찮은 것일지라도 마음이나 정성이 담겨있을 때 귀할 수 있다는 말이 진리임을 깨닫게 한 작은 사건이었다. 오늘따라 점수의 마지막 모습이 하루종일 머릿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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