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다. 한국 가정의 78%가 고속 인터넷에 접속하고 있다. 이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유럽 평균의 4배에 달한다. 흥미로운 점은 너도나도 ‘인터넷 강국’만을 자랑할 뿐 70년대까지 전화 한 대 놓기도 힘들었던 한국이 어떻게 이렇게 단시간 내 첨단 통신망 선진국이 됐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는 점이다.
혹자는 한국인의 “빨리 빨리” 근성이 초고속 통신망과 맞아 떨어져 그렇게 됐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정부의 규제 완화와 자유 경쟁 체제 도입에 있다. 90년대 중반 지금은 무능의 상징으로 꼽히는 김영삼 정부는 한국 통신이 독점하고 있던 전화 시장에 경쟁 체제를 도입하기로 결정, 고속 통신 시장에 대한 규제를 철폐했다. 새로 문이 열린 인터넷 통신망에 경쟁 업체가 뛰어들자 한국 통신도 대대적인 투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이 초고속 통신 신진국이 된 발판은 그 때 놓여졌다.
이는 한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이민 온 한인들은 분당 3달러나 하는 비싼 전화 요금 때문에 한국에 전화를 걸 때 시간을 아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제 한국과의 전화 요금은 수 센트에 불과하다. 미 전화 시장 판도가 이렇게 달라진 것은 80년대 초 연방 법원이 AT&T의 시장 독점을 깨고 자유 경쟁 체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 후 장거리, 단거리 등 온갖 전화 회사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나날이 오르는 물가에도 불구, 20년 동안 국제 전화 요금만은 수십 분의 1 수준으로 내려간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노무현 정부의 성격을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 진영에서는 “좌파 정권”이라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지만 민노당 등 일각에서는 “좌파는커녕 중도도 아니다”라고 맞서고 있다.
이렇게 극단적인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비판 그룹의 성향이 극과 극인 탓도 있지만 노무현 정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탓이 더 크다. 어떨 때는 부자와 대기업에 대한 중과세 등 반기업적 정책을 펴는 것 같다 또 다음날은 사기업체에 토지 수용권을 주는 등 어떤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업 우대 정책을 편다.
한국 정부의 이런 갈팡질팡 정책의 이면에는 40년 전 적도 기니 수준이던 한국이 세계 10위 권에 드는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게된 원인이 어디 있는 지에 대한 이해 결핍이 놓여 있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한국 경제를 수출 주도형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국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국 기업들은 싼 인건비와 비교적 높은 교육 수준을 무기로 의류 신발 등 저가 시장을 파고들기 시작했고 점차 노하우가 쌓이면서 중공업과 첨단 산업 분야로 도약해 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냉혹한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 시장에서 싸우며 얻은 상품의 경쟁력이 오늘의 한국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런 한국 경제의 기본 틀은 전두환과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 하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도 입으로는 시장 경제와 국가 경쟁력 강화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말을 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국내외 투자가들 사이에 한국에 대한 불안이 높아 가는 것은 노무현 정부가 친일파와 독재 정권 하수인들에 대한 단죄에는 열을 올리면서 역대 정권이 이룩한 경제적 업적을 인정하는데는 인색하기 때문이다.
모건 스탠리와 골드만 삭스, 메릴 린치 등 해외 주요 증권사들은 잇달아 한국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진단하는 보고서들은 내놓고 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지은 죄는 밉지만 그들이 말했다고 “1 더하기 1은 2”라는 명제가 허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저지른 정치적 범죄와 경제적 업적은 분리해 따져야 한다. 노무현 정부가 ‘과거 청산’이란 목욕물을 버리려다 그 안에 든 ‘경제 성장’이란 아기까지 내던지는 일이 없기를 부탁한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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