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선은 지난 3일 케리의 승복 연설로 끝났다. LA 노인아파트의 한인 할머니에서부터 아프간 동굴 속 이슬람 전사들의 관심까지 끌어 모았던 한 편의 정치 드라마는 이 연설로 마침표를 찍었다. 한 시간 뒤 부시가 당선 연설을 했지만 드라마로서의 감동은 거기까지였다. 케리는 키가 2미터에 이르는 장신인데 연설을 마치고 연단을 내려서는 그의 키는 더 커 보 였다.
전통처럼 굳어진 미 대통령 선거의 패자 연설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패장의 연설을 들을 때마다‘저 사람이 진정한 대통령감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마저 든다는 사람도 있다. 정치가의 연설 하나를 듣고 인품까지 판단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하지 않나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으나 나는 TV앞에서 그의 연설을 지켜보며 케리는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리라는 생각을 했다.
미국의 선거에서는 패자가 없고, 자고 일어나면 모두 미국 시민이라는 말은 인상적이었지만 그 스스로 당파적 분열을 잇는 다리가 되겠다며 지지자들에게 동참을 호소한 것은 케리 같은 정치 지도자가 하지 않으면 안될 말로 들렸다. 그는 후보로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 악수하며 포옹할 수 있었던 것을 특권이었다고 감사했다.
선거 후 적지 않은 미국민들이 분열과 대립을 염려하면서 사회적 통합을 과제로 지적하고 있지만 이것은 결국 큰 문제가 아닐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다. 미국 민주주의의 저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재선 대통령은 한결 여유있는 모습으로 새 비전을 제시하기 시작했고, 민주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아쉬움 속에서도 4년 후를 기약하며 제 자리를 찾고 있다.
이번 선거 때문에 검찰이나 FBI에 불려 다니는 사람도, 무슨 게이트로 감옥에 가는 사람도 없고, 정치 보복이다, 아니다로 핏대를 세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미국 이야기 끝에 이같은 한국 이야기를 갖다 붙이는 것을 이민1세의 상투성이라고 비난한다면 미안한 일이나 이 선거를 보면서 또 한국 생각이 나는 것은 바로 다음 주에 노무현 대통령이 LA를 방문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LA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LA에 인맥과 지인이 거의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따뜻한 마음으로 한국 대통령의 LA방문을 환영하고 싶어진다.
드라마라고 하면 2년 전 노무현의 한국 대통령 당선이 올 미국 대선 보다는 더 극적이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한국 사회의 비주류를 대통령에 선출한 것은 한국인 특유의 과단성과 에너지가 없다면 불가능했을 일로 보인다.
문제는 그 뒤에 벌어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지역과 계층 갈등이 심각한 한국에서 새로 등장한 이념 갈등 때문에 밖에서 볼 때는 위험할 정도로 사회가 찢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이번 선거 후 미국에서처럼 화해와 통합을 주문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두 갈등세력이 지금 타협하고 화해하는 것만이 한국사회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일일까.
지금 한국의 갈등은 오래 묵어서 고착된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 온갖 탈법이 정직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필연적인 불화로 비친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더 근본적이고도 치열하게 갈등하고 싸워야 할 때가 아닌가라는 지적도 있다.
이점에서 대통령 선거 후의 한국과 미국은 서로 다르다는 생각이다. 케리와 같은 패자의 감동적인 승복 연설은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서울에서도 가능해질 것으로 본다.
안상호<부국장 대우·사회부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