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동안 LA한국문화원에서 근무한 신태옥씨가 문화원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진천규 기자〉
“첫 한글교실 10년전만해도 7명뿐이었죠”
지금은 200명 북적
한국 알려는 이 많아
홍보관 활동 등 보람
지난달로 ‘은퇴’
LA 한국문화원이 개장하기 한 해 전인 79년부터 문화원 창설멤버의 한 사람으로 일해 온 최고참 신태옥(50·전 도서관 사서)씨가 지난달을 끝으로 25년 문화원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새 26세 청춘은 50세 중년이 되었지만 그녀는 그 세월 동안 한국어와 한국문화가 미 주류사회로 지평을 넓혀 가는 것을 지켜본 산 증인이 됐다.
79년 10월 LA에 도착한 신씨는 애지중지 키워 온 문화원이 어느덧 25세 청년이 돼 늠름하게 자리를 잡은 모습에 뿌듯하기만 하다.
“북한 문화원이냐”는 미국인들의 질문을 들었을 정도로 문화원이 개관한 1980년은 황량한 벌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벌판 속에 한 송이 꽃을 피워내듯 문화원은 첨단 공연장과 도서관 등을 갖춘 현대식 건물에 연 3만명이 이용하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
신씨는 자신의 문화원 생활을 “공사로 시작해 공사로 마감했다”고 한다. 지난 7월 문화원이 리모델링을 마치며 26세 아가씨의 손때 묻었던 흔적들은 희미해졌지만 신씨는 “새로운 25년을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신씨가 자리를 지키는 동안 25명의 문화원장과 영사들이 오고 갔다. 신씨는 95년 한글 강좌를 처음 개설했던 7대 원장 이홍석씨를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꼽는다. 첫 한글 강좌를 개설했을 때 수강생은 10여명. 지금은 문화원을 대표하는 프로그램으로 미국 신문기자 등 200여명이 수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국어의 세계화란 말이 낯선 시절 척박한 땅에 씨앗을 뿌렸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25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간 것 같다는 신씨는 LA 올림픽 당시 두달 이상 홍보관을 차려 한국 홍보에 여념이 없던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다. “세계의 모든 눈이 집중돼 있어 한국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힘든 줄 모르고 일했던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고 한다.
신씨는 한국 문화에 대한 열의가 있는 사람들에게 지원을 해 줄 수 없을 때가 가장 안타까웠다고 한다. 8명의 적은 인원과 한정된 예산 때문에 “먼 지역에서 버스 등 교통편 제공과 외부 지원행사를 요청해 올 때 ‘죄송합니다. 안 되겠는데요’라고 말하기가 참 힘들었다”는 것이다. 오래 일해 왔으니 문화원 리모델링이 끝나면 그만두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그녀는 “아쉬움이 있냐고요”라고 반문하며 “25년간 폭주기관차처럼 달려왔는데 저도 이제 좀 쉬어야지요”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석호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