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을 노래한 T. S. 엘리옷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런 그가 숱한 서양의 시인 중 정말 위대한 시인으로 꼽은 사람이 둘이 있다. 하나는 셰익스피어고 다른 하나는 단테다.
이 중 셰익스피어가 극작가로 더 많이 알려진 점을 감안하면 순수 시인으로서는 단테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가 죽은 지 700년이 지나도록 그의 명성이 빛을 잃지 않고 있는 이유는 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천국을 아우르는 광대무변한 그의 상상력 탓도 있지만 그의 시적 비전이 중세 신학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 ‘신곡’ 중 가장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지옥’ 편을 보면 중세의 인간관, 특히 죄의 질에 대한 생각이 현대인과는 많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버질의 인도로 지옥에 들어선 단테가 제일 처음 목격한 것은 살아 있을 때 선의 편에도 악의 편에도 서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바람 부는 대로 휩쓸려 다니며 모기떼의 공격을 받는다. 죄가 가벼운 만큼 벌도 가볍지만 선과 악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은 이들은 천국과 지옥 모두로부터 경멸의 대상이다.
그 바로 다음 단계가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살다 죽어 기독교를 접할 기회는 없었지만 도덕적인 삶을 살다간 사람들이 사는 ‘림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 철학자들이 고담 준론을 논하며 영원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 밑에 희미한 빛조차 없는 지옥 본바닥이 전개되는데 그 가운데 가장 가벼운 죄인은 욕정을 이기지 못한 자들이며 탐욕스러운 자들, 흉폭한 자들, 이단자들, 살인자, 사기꾼 순으로 돼 있다. 단테에 따르면 지옥 입구에 가까울수록 죄가 가볍고 지옥 밑바닥으로 들어갈수록 죄질이 나쁘다.
흥미로운 것은 사기를 친 사람들이 사람을 죽인 자들보다 죄가 중한 것으로 분류돼 있다는 점이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귀한 선물인 지능을 악용해 다른 공동체 소속원인 이웃을 속인다는 것은 동물적 충동에 의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중세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사기꾼 아래에는 보통 이웃이 아니라 자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따라서 더욱 신의를 지켜야할 친척과 손님, 주인을 배신한 자들이 무거운 벌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다가 지옥 맨 밑바닥에 있음은 물론이다.
최근 LA 한인 사회에서 한인이 한인을 등치는 사기 사건이 빈발하고 있다. 으리으리하게 사무실을 차려 놓거나 그럴듯한 단체장 명함을 갖고 사기를 치는가 하면 동료 교인을 상대로 피해자를 물색하기도 한다. 사기 행각이 적발된 뒤에도 전혀 반성의 기색이 없다. 오히려 “돈을 돌려주면 그만이지 웬 야단이냐”고 큰소리를 친다. 단테가 봤으면 모두 지옥 저 아래 놓았을 인물들이다.
사기는 단순 절도와는 달리 상당한 지능과 지식이 요구되는 범죄다. 어느 정도 배운 사람이 아니고는 범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소위 ‘유식한 사람’, ‘배웠다는 사람’이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사회 존립의 기초인 신뢰를 깨뜨렸다는 점에서 특히 죄질이 나쁘다. 피해 액수도 억 단위에 이르는 등 단순 절도와 비교가 안 된다.
현찰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많은 한인 사회는 오래 전부터 강도들의 표적이 돼 왔다. 한인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이제는 여기에다 사기꾼들까지 들끓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사기 행각의 빈발을 방치할 경우 개개인이 피해를 입는 것은 물론이고 한인 사회의 금융질서가 흔들릴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하루 종일 열심히 직장에서 일하고 아껴 써 남은 돈을 착실히 저금하는 사람에게는 사기꾼이 접근하지 않는다. 한인 사회에 사기꾼이 횡행한다는 것은 땀흘려 돈벌기보다는 요행히 일확천금을 노리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기꾼을 잡고 처벌하는 것은 사법 당국이 해야할 일이지만 사기를 당하지 않을 일차적인 책임은 각자에게 있음을 명심하자.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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