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그 해 초까지만 해도 부시가 재선에서 실패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제2차 대전 영웅이었던 조지 H. W. 부시는 걸프전에서의 승리로 한 때 90%에 달하는 지지율을 얻었었다.
반면 그 상대로 나온 민주당의 클린턴은 이름 없는 중서부 한 주의 주지사 경력이 전부고 월남전 때는 징병 기피 행각을 벌였으며 수많은 여성과 추문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클린턴의 완승이었다. 이를 두고 정치 평론가들은 뒤늦게 걸프전 승리에 도취한 부시가 불황으로 고통받는 미국인의 민심을 읽지 못했다고 평했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은 클린턴도 마찬가지였다. 취임하자마자 대다수 미국인들은 별 관심도 없는 동성연애자의 군복무 허용 문제를 들고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힐러리는 밀실에서 의료 산업을 국가 통제 하에 두는 사회주의적 정책 수립에 골몰했다.
그 결과는 1994년 중간 선거에서의 참패였다. 40여 년 만에 처음 연방 하원을 공화당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클린턴은 이제 끝났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그러나 주위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은 미 국민의 메시지를 파악했다. ‘힐러리 케어’로 불리던 무리한 의료 개혁은 포기하고 군대내 동성애자 문제도 ‘묻지 않고 답하지 않는다’ 선에서 타협했다. 민주당 내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웰페어 중독자를 양산해 온 구식 웰페어 제도를 과감하게 수술했으며 균형 예산을 이룩했다.
그 결과 1996년 선거에서 공화당의 밥 도울을 물리치고 압승을 거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래 민주당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재선에 성공하는 위업을 이룬 것이다. 반면 클린턴을 잡겠다던 공화당의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은 민심을 잘못 읽고 행정부를 폐쇄하는 등 악수를 두다 결국 정계를 은퇴하고 말았다.
4월 30일 한국에서 열린 재보선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참패를 했다. 6명의 국회의원 선거구는 물론이고 지방 자치단체장을 비롯한 23개 선거구에서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한국에서 그 동안 많은 선거가 있었지만 이처럼 철저하게 깨진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선거전 열린 우리당은 지리멸렬한 한나라당을 비웃으며 들떠 있었다. 행정 도시 건설을 약속한 충청도는 ‘따 놓은 당상’이라느니 ‘처음으로 경상도에서도 이겨 지역주의를 깨겠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내부를 단결시키기 위해서는 외부의 적을 만들라’는 고전적인 가르침에 따라 반일 감정도 한껏 높여 놨겠다 승리는 여반장이란 생각이 들 법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딴판이었다. 지금쯤 열린 우리당 지도부는 ‘이게 웬 일인가’ 하며 어리둥절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서울에 다녀온 사람들이 택시 운전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사람 한번 잘못 뽑아 모두 굶어 죽게 생겼다”라는 것이 이들의 한결 같은 푸념이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한나라당의 자충수로 원내 과반수라는 어부지리를 한 열우당은 마치 자기가 잘나 그렇게 된 것 같이 민생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일을 하는 데 온 정력을 쏟아 부어왔다. 행정 수도 이전을 비롯 국가 보안법, 사학법, 언론법 개정안 모두 국민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과는 무관한 일임에도 집권당은 이들 법안 통과에 목숨을 걸었다.
처칠은 “민주주의는 다른 모든 주의를 제외하면 최악의 제도”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제도도 없다는 뜻일 게다. 그 중에서도 집권자가 국민의 뜻과 다른 길을 갈 때 선거라는 평화적 방법을 통해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 최대의 장점이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 사이에 중간 선거라 불리는 국회의원 선거가 열려 중간 평가의 역할을 한다. 대선과 총선 일정이 그렇게 맞물려 돌아가지 않는 한국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재보선이다. 한국 정부와 여당은 지금이라도 국민의 뜻에 맞는 정치를 펴주기 바란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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