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 황제’카리스마, 90년대부터 이미지 실추
마이클 조 잭슨은 1958년 8월29일 인디애나주 게리시에서 팔콘스라는 그룹의 기타리스트였던 조와 클라리넷 연주가였던 어머니 캐서린 잭슨 사이의 9남매 중 5째로 태어났다.
음악과 관중이 있는 무대 위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팝의 황제자리에 오른 그의 시작은 자식들을 가수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열성에서 비롯됐다.
1960년대 이미 저메인, 티토, 재키, 말론으로 구성된 보컬 ‘잭슨 포’에 7세인 마이클이 합류하면서 새로 태어난 ‘잭슨 파이브’는 가장 인기 있는 그룹으로 떠올랐다.
그후 솔로로 독립한 그는 1979년 천재 꼬마스타가 한 사람의 성인으로 탈바꿈하는 의미를 지닌 대망의 솔로앨범 ‘오프 더 월’(Off the Wall)을 발표하면서 국내서만 800만장의 판매고와 그래미상 최우수 R&B 부분을 수상했다. 그의 인기는 1982년 2집 앨범 ‘드릴러’(Thiller)를 발표하면서 하늘을 찔렀다. 드릴러는 현재까지 통산 5,200만장이라는 상상을 초월한 판매고를 올리며 마이클 잭슨 시대 개막 및 뮤직 비디오 선풍을 전세계에 알렸다.
그로 인해 83년 제26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8개 부문을 휩쓸고 그해의 거의 모든 음악상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1985년에는 유명한 ‘We Are the World’를 발표하며 맹활약을 계속했고 1987년의 앨범 ‘배드’(Bad)나 1992년의 ‘댄저러스’(Dangerous)도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음반 최대 판매량 기네스북에 올랐고 전세계 가는 곳마다 광란과 숭배의 대상이 됐던 그에게도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는 ‘정상이 아니다’란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의 성추행 재판의 모체가 된 듯한 아동 성추행 혐의가 1993년 처음 보고되면서 그의 이미지가 실추됐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의 갑작 결혼과 이혼, 또 백인이 되려는 열망의 수많은 성형수술 등, 대인기피증, 자신의 아기를 발코니에서 흔들기 등으로 인한 여러 기행들이 고개를 쳐들면서 그는 이중적이고 가식적이며 우스꽝스런 인물로 전락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샌타바바라의 광대한 땅에 ‘영원히 동심에 사는 피터팬‘을 주제로 한 유원지 및 별장인 네버랜드를 조성했다. 어린이들을 위해 조성했다는 네버랜드에서 그는 2003년 봄 어린이, 특히 암투병중인 13세 소년을 성추행했다는 등의 10가지 혐의로 기소돼 재판정에 서게 됐다.
<이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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