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의 유니온 스트릿에 있는 뉴욕 대한체육회의 사무실은 요즘 호떡집에 불난 듯이 바쁘다.
체육회가 벌리고 있는 행사가 많은데다 미국 각지에서 방문하는 체육 관계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는 7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제 13회 전미주 한인체육대회를 앞두고 뉴욕의 출전팀을 접수한 지난 10일 신청을 접수하러 온 가맹단체 대표와 방문객들로 북새통을 이룬 사무실에는
외부의 문의전화가 쇄도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체육회는 한국의 IOC 위원인 이건희 삼성 회장과 박용성 두산 회장에게 2012년 뉴욕올림픽 유치를 호소하는 서신을 발송 하느라고 분주했다. 뉴욕대한체육회를 정경진 회장이 맡고 난 후 체육회가 이렇게 달라졌다.
정경진 회장은 경희대 체육과를 나온 정통 체육인이다. 뉴욕대한체육회 설립 당시 체육회를 만들자고 처음 제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당시 주상점, 임동실씨 등과 체육회를 조직하다가 오응서씨가 주도하게 되자 손을 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체육계를 떠나지는 못해 미동부 대한체
육회 이사장, 재미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지냈고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세계 한민족축전의 대회장을 맡았다. 서울 잠실의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세계 한민족축전은 세계 141개국의 한인 체육인들이 참가한 전무후무한 규모의 세계 한인체전이었다.
이런 활동을 하다가 그는 2003년 뒤늦게 제 12대 뉴욕대한체육회 회장을 맡아 그가 처음 만들려고 했던 뉴욕체육회로 돌아왔다. 그는 회장을 맡으면서 조직을 정비하고 각종 행사를 시작했다. 또 그 때까지 역대 회장의 업소나 자택을 연락처로 삼아 활동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유니온 스트릿에 현재의 사무실을 마련했다. 이렇게 2년 임기를 마친 그는 13대 회장에 재선됐다.
정회장이 체육회를 맡은 후 시작한 크고 작은 행사는 수없이 많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004년 9월에 개최한 제 1회 다민족 축구대회이다. 이 대회에는 한국, 멕시코, 콜롬비아 등 12개국 팀이 출전했는데 한인들이 축구 강국인 남미 각국의 팀과 대전함으로써 기량을 키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종화합에 크게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금년의 제 2회 대회는 10월에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또 체육회는 지난해 롱아일랜드의 아이젠하워 파크에 제 1회 한인 스포츠 축제를 연데 이어 금년에는 8월 7일과 14일에 퀸즈의 커닝햄 팍에서 제 2회 한인 스포츠 축제를 열 계획이다. 특히 이번 축제는 광복 60주년을 경축하는 한인종합체육대회로 계획하여 대대적인 규모와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한다.
이런 행사도 중요하지만 정회장이 중요시하는 것이 또 있다. 이민 교포들이 힘든 생활을 하면서 자칫 건강을 잃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한인들의 건강을 위한 생활체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생활체육 프로그램이다. 4월부터 11월까지 매주 일요일 아침 7시
에 플러싱 고등학교 인조구장에서 실시하는 이 프로그램은 여자들의 에어로빅에서부터 축구, 테니스, 배드민튼, 경보 등 다양한 종목의 운동을 지도하며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고 한다.
정회장은 체육분야 뿐만 아니라 뉴욕 한인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온 올드 타이머의 한 사람이다. 1970년대 초 청과상을 경영하던 때 청과상조회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회칙을 만드는데 앞장 섰던 사람이다. 1971년부터 74년까지 뉴욕한인회의 조시학 회장과 김정원 회장 당시 한인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는데 한인회에 사무총장이 생긴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후에는 음악인협회, 에밀레 오페라단 등 한인 음악활동을 돕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 활동한 것보다 한국에서 지낸 젊은 시절이 더 화제거리가 된다. 경북 안동 출신인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때부터 고학을 했다. 여름방학 때는 안동의 외가에서 고추를 가져다 기차로 부산으로 실어날라 팔기도 했다. 한 번은 부산역 대합실에서 비에 젖은 고
추를 펼쳐 말리다 역원들에게 얻어맞고 있을 때 지나던 사람이 말려서 위기를 모면했는데 그가 바로 ‘거지왕’으로 이름난 김춘삼씨였다. 이 사건으로 이해 그는 김씨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정회장은 당시 전쟁고아들을 모아 합심자활원이라는 고아원을 경영하고 있던 김씨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걸인과 양아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5.16 후 군복무를 마친 뒤에는 아예 김씨와 함께 걸인과 양아치들을 대구의 달성공원에 집결시켜 놓고 시청에서 구호미를 얻어 이들
을 먹이면서 경북 영양군 일대의 개간사업을 시작했다. 이 때 김춘삼씨는 정회장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것이다. 정회장은 그 후 고등학교 교사로 복직했고 월급을 타면 생활비를 빼고 나머지는 모두 이 걸인들에게 갖다 주었다고 한다.
정회장은 모태신앙의 철저한 기독교인이다. 만약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의 인생은 지금과는 딴판으로 어두운 세상을 살았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그는 안동고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종교음악과에 합격했으나 학비가 없어서 진학을 포기했다가 후에 선교사의 도움으로 대구
계명대 기독교교육과에 진학하여 2년을 수료했다. 그 후 대구와 예천에서 고등학교 음악교사를 하면서 합창단을 지휘했고 군복무 중에는 대민봉사로 인제고등학교 음악교사로 파견 근무했다. 제대 후 김춘삼 그룹에 합류했으나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 경희대 체육과에 진학했다. 이
학교를 졸업할 때 김춘삼 이하 단원 100여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졸업식장에 나와 진풍경을 이루기도 했다고 한다.
정회장은 경희대 졸업 후 기독교계 학교인 숭실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미국인 친지의 알선으로 시카고의 루즈벨트대학에 유학하기 위해 1970년 5월 도미했다. 그러나 그 당시 그의 영어실력으로는 학업을 따라가기가 어려워서 중도에 포기하고 뉴욕으로 왔다고 한다. 뉴욕에서 주유소 종업원, 트레일러 운전사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다가 청과상을 경영했고 한 때는 리무진 관광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뉴욕대한체육회의 회장이며 재미대한체육회 지회장 협의회의 회장이기도 하다. 그는 이같은 직함으로 2012년 뉴욕올림픽 개최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와 함께 7월 21일부터 23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는 제 13회 전미주 한인체육대회에는 뉴욕대한체육회 가
맹단체 23개 중 17개 종목이 출전하는데 정회장은 뉴욕선수단이 우수한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최선의 지원활동을 할 것이라고 한다.
주위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나이먹은 사람이 감투를 좋아해서 체육회장을 한다고 오해할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체육인생을 살아온 자신의 마지막 봉사로 생각한다는 것이 정회장의 자신에 찬 신념이다.그는 특히 2012년 뉴욕올림픽이 성사된다면 이 올림픽대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보태고 싶
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이기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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