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한분이 외출에 앞서 중요한 서류를 읽어야 했다. 서류를 읽으려면 안경이 필요한데 안경이 눈에 띄지를 않았다. 위층, 아래층을 오르내리며 있을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외출 시간은 다가오고, 서류는 꼭 읽어야 하고… 선배는 하는 수 없이 평소에 잘 쓰지 않던 여벌의 안경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안경을 끼는데 자꾸 부딪쳐요. 눈앞에 뭔가가 걸리는 거예요. 그래서 보니 내가 안경을 끼고 있었던 것이었어요”
‘등에 업은 아이 3년 찾는다’는 중년의 단골 화제 - 건망증 이야기이다.
안경 때문에 웃은 일은 최근 내게도 있었다. 뭔가 읽으며 메모를 하던 중에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끊고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보니 안경도, 볼펜도 보이지를 않았다. 책상 위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안경집을 열어보았다. 무의식중에 물건을 제자리에 놓은 경험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경집을 열어본 순간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안경집 안에는 엉뚱하게도 볼펜이 얌전히 들어앉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볼펜을 안경집에 넣었는지, 그 순간은 완전한 백지이다. 영화 편집과정에서 필름이 잘려나가듯 기억의 흔적도, 편린도 남아있지 않았다.
있을 때는 모르다가 없어지고 나면 그 고마움을 아는 대상으로는 사람과 건강이 대표적이다. 중년이 되면 거기에 기억력을 보태야 할 것 같다. 충실한 하인처럼 필요할 때마다 즉각 달려오던 기억들이 하나둘 딴전을 피우고, 때로는 아예 종적을 감춰 버리기도 한다.
악수를 하면서도 상대방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당황하게 되고, 누군가와 점심약속을 했는데 그게 누구였는지 생각이 안 나서 답답하며, 깜빡 잊은 탓에 본의 아니게 노브라로 외출을 하곤 민망스러워 하면서, 기억의 배신을 원망한다.
기억을 커다란 창고가 딸린 이중 구조의 방으로 보면 어떨까. 앞에는 작동 기억이라는 방이 있고 그 안쪽으로 장기 기억이란 창고가 있다.
작동 기억이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인지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억. 장기 기억은 우리의 오감을 거친 모든 정보의 데이터 베이스이다. 초등학교 소풍 가던 날의 날아갈 듯한 기분, 기대에 부풀었던 첫 미팅, 그와 처음 만난 날의 설렘 등 희로애락의 에피소드, 책이나 강의를 통해 얻은 지식… 모든 경험은 차곡차곡 장기 기억의 창고에 쌓인다.
그래서 매 순간의 경험은 장기 기억의 창고로 보내지고,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장기 기억으로부터 작동 기억으로 끄집어내 활용하는 작업의 끊임없는 반복이 결국 우리의 삶이다.
문제는 어느 나이가 되면 보관물량이 너무 많아서 ‘창고’정리가 잘 안 된다는 것. 어린 시절 창고가 여유 있을 때 보관해둔 정보들은 지금도 선명한데, 불과 며칠 전 정보는 어느 구석에 처박혔는지 찾기가 힘들다. 게다가 기억 창고에 정보를 보관하고 검색하는 과정도 온전할 수는 없다. 뇌신경조직의 노화로 정보가 중간에 사라지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한다. 이런 식의 왜곡이다. 건망증 조크이다.
70대 할머니들의 동창회에서 한 할머니가 교가를 부르자고 했다. 다른 할머니들이 모두 잊어버렸다고 하자 그 할머니는 대표로 교가를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동창 할머니들은 박수를 치며 칭찬했다 - “ 얘는 어려서 공부를 잘 하더니 나이 들어서도 기억력이 좋아”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자랑을 했다. 할아버지 역시 놀라워하며 “다시 불러 보라”고 하자 할머니는 신이 나서 다시 불렀다. 노래를 들은 할아버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 우리 학교 교가와 너무 비슷해”
더 똑똑한 사람, 더 못난 사람 없이 지능의 평준화를 이루며 편안하게 늙어가도록 만드는 것이 기억력 감퇴는 아닐까. 너무 완벽해서 인간미 없던 사람들이 나이 들며 푸근해지는 데는 건망증도 한몫을 한다. 단, 화초에 물주면 자라듯이 뇌도 지적 자극을 계속 주면 성장을 계속한다는 사실은 잊지 말자.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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