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 마이어스 대법관 지명자가 끝내 낙마했다.
내달 7일로 예정된 법사위원회 인준청문회를 앞두고 지명 자진철회 형식을 빌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 버린 것이다.
대통령의 총애를 등에 엎고 백악관 보좌관 출신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연방 대법관 지명까지 받았던 마아어스의 갑작스런 추락은 이미 한물 홍콩 느와르 액션물의 소재로 부족함이 없다.
줄거리를 꾸려보면 대충 이렇다. 마이어스는 국내 최대 조직의 보스인 조지 W. 부시의 여자다.
조직의 규율을 관장하는 9인 감사위원회의 멤버중 한명이 은퇴를 선언하자 부시는 자신이 총애하는 마이어스를 새로운 감사관으로 지명한다. 그러나 조직의 주축인 카포(중간 보스)들과 패밀리 원로들은 보스의 결정에 공공연히 반기를 든다. 보스의 총애가 두텁다 해서 조직의 생리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에게 감사관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기는 것은 부당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자신의 친위세력이나 마찬가지인 카포와 원로들의 반발에 부시는 당황한다. 호령 한마디로 반대를 묵살해 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지만 상황 역시 그의 편이 아니다.
그의 충직한 심복인 칼 로브가 보스에게 등을 돌린 전직 카포 조셉 윌슨에 대한 보복으로 윌슨의 아내가 경찰에 침투한 조직의 끄나플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흘렸고, 이로 인해 조직 안팍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거푸 발생한 악재들로 극심한 자금압박 요인이 발생한데다 타 패밀리와의 무리한 ‘전쟁’으로 인명피해와 경제적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나날이 대담해지는 조직내 견제세력의 공세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다.
이런 곤궁한 상황에서 카포 그룹은 보스의 견제세력과 묵시적인 제휴하에 본격적인 마이어스 헐뜯기 공작을 벌인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부하들에 의해 거의 매일 집단 공격을 당하는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부시는 자신의 좁아진 입지에 새삼 분노와 절망감을 느낀다.
하지만 자신의 세력기반을 허물 수 없는 그는 결국 마이어스를 포기한다는 의사를 내비치고, 보스의 신호를 알아 챈 그녀는 “사랑의 이름으로” 지명 자진 철회를 발표하게 된다.
대충 이런 줄거리에 여기 저기 화려한 할리웃 액션을 끼워 넣으면 사랑과 배신, 음모와 폭력이 비빔밥처럼 뒤섞인 홍콩 느와르 영화 한편이 나올 수 있다.
자, 그러면 이제 현실로 돌아가 그녀의 지명철회를 유도한 실체가 누구인가 한번 따져보자.
그녀를 울린 베일뒤의 세력은 가상 영화속의 카포 그룹인 공화당인가, 아니면 보스의 견제세력인 민주당인가. 그도 아니면 패밀리 원로집단인 보수 진영인가?
민주당측은 “절대 우리가 아니다”고 반박한다. “마이어스가 부시의 최측근이긴 하지만 판사 경험이 전무한데다 그녀의 법철학을 읽을 수 있는 단서가 별로 없기 때문에 일단 청문회를 통해 성향 분석부터 해보자는 것이 우리들의 작전이었다”는 것. 민주당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마이어스가 부시의 ‘가신그룹’에 속한 것은 사실이지만 확인된 극보수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민주당으로선 무턱대고 반대할 입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민주당은 검증된 극보수주의자가 대타로 나서는 것을 막기 위해 ‘함량미달’의 자질시비에 휘말린 마이어스에 비교적 관대한 제스처를 취했었다.
마이어스가 우군인 공화당과 보수세력의 공조 공작에 무너졌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부시의 최대 지지기반인 보수층은 그가 선거전 당시의 약속을 어기고 낙태와 동성혼등 주요 쟁점안에 무심한 백악관 측근을 대법관에 지명한데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이어스의 자질시비가 야권보다 여권에서 더 큰 반향을 얻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마이어스의 낙마는 부시 2기 정권을 둘러싼 주도권 확보 전쟁에서 극우파가 재득세한 반면 친정체제 강화에 초점을 맞춘 부시의 포석이 불리한 주변 여건과 맞물려 급격히 허물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이강규<국제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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