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욱씨가 대한민국 참전경찰유공자회로부터 받은 감사패를 들어 보이며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시민권자협 부회장 이연욱씨
미 제7보병사단에서 군복무
OC 한인사회에서 누구 못지 않게 활발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이연욱(81) OC 시민권자협회 부회장. 그는 지난해 11월 집안일로 한국을 방문했다 뜻하지 않은 큰 선물을 받았다.
이씨는 6.25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 유엔군 미 제7보병사단 산하 부대에서 군복무를 했지만 어디에도 이에 대한 공식 기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같은 소속이었던 화랑부대에 발걸음을 했다 이번에 50여년만에 자신의 기록을 찾게 된 것.
“그 때만큼 기뻤던 적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대단한 공훈을 세우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꼭 제 기록을 찾고 싶었거든요. 만약 찾지 못했다면 평생 한이 되었을지 몰라요. 이제는 속이 후련합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씨는 서울을 떠나 고향인 안양으로 피난을 떠났다. 같은 해 9월15일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 제7보병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이 제10군단 지휘하에 크로마이트(Chromite)라 불렸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안양에는 미군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 3일 후 미군이 안양에 들어왔고, 이씨는 조금이라도 조국 평화에 보탬을 주고 싶은 마음에 미군을 찾아가 자원 입대를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 그렇게 군복무를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 육군 공보관으로 군에 몸담았던 그는 자신의 기록을 찾자마자 대한민국 참전경찰유공자회(회장 문학동)에 연락을 취했고, 사선을 함께 넘나들며 조국을 위해 싸웠던 전우들과 반세기만에 해후했다.
문 회장(당시 북파를 목적으로 현직 경찰들로 구성된 화랑부대 총 책임자)의 ‘드디어 전우를 만났네’라는 첫 마디에 눈물이 핑 돌았다고 이씨는 그 때를 떠올렸다. 그는 “‘건강하게 오래 살다보니 이렇게 좋은 일도 생기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내친 김에 이씨는 지난해 12월15일 대한민국 미국 서부지회 회원으로 등록까지 했다. 그는 “내일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지역사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를 할 작정”이라고 했다.
이씨는 지난 70년 시카고에 처음 정착해 ‘신정’이라는 한식당을 10년 넘게 운영해 왔다. 둘째딸 희주씨의 권유로 96년 어바인으로 이주해온 그는 둘째딸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부인 금옥(71)씨와의 사이에 3남1녀를 두고 있다.
<이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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