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지난해 초여름 오후 7시쯤이었을 것이다. LA시청 기자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설 때 시청 복도 창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저녁 햇살을 배경으로 흰색 작업복 차림의 흑인 아저씨가 물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저녁 햇살과 천장에 매달린 청동 전등에서 쏟아지는 불빛에도 불구하고 웅장한 시청 복도는 어두컴컴했고, 이를 뒤로하고 걸레질하는 흑인 청소부의 모습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밤 청소를 했던 개인적 경험을 되새기게 하는 것은 물론 인권운동이 정점으로 치닫던 60년대 “흑인에게 제한된 직업 기회” 같은 제목의 기사와 함께 게재됐을법한 보도사진을 보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기자실 출입 1년을 넘으면서 느낀 것은 ‘2등 시민’으로 여겨지던 라틴계가 시장이 되는 격세지감에도 불구하고 120개 국어가 사용되는 ‘국제 도시 LA’를 움직이는 시정부 기득권은 여전히 북유럽계 백인 이민 후손들 손에 있다는 것이다. 주요 행정부의 수장은 백인들 몫이다. 흑인, 라틴계, 한인 등 아시아계 공무원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간 매니저급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정 소수계가 특정 부서에 밀집돼 있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예를 들면 육체적 노동이 요구되는 공공사업국 부서는 라틴계가, 주차 단속국에는 흑인 직원들이 많다. 시정부 전산망과 컴퓨터를 다루는 IT부서는 공교롭게도 중국계 등 아시아계가 장악하고 있다.
여론을 움직이는 언론도 특정 인종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 시청 기자실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주류 6개 신문사 및 1개 라디오 방송국 중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을 시청 담당으로 내 보낸 곳은 법조전문지인 ‘데일리 저널’ 단 1곳에 불과하다. 그리고 내가 시청 기자실로 첫 출근한지 얼마 안됐을 때 백인 기자들은 “기자단 구성원이 많이 변화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등뒤에서 하기도 했었다.
인종간 차이와 불편한 관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이를 거론하려는 사람들은 드물다. 이처럼 인종간 갈등은 옛날 이야기란 착각이 지배하는 지금 뿌리깊은 인종문제를 다룬 영화 ‘크래쉬’가 화제를 낳고 있다.
제78회 아카데미상에서 최고작품상을 거머쥔 이 영화의 무대는 LA다. 영화는 백인, 흑인, 라틴계 간 골 깊은 갈등을 다루며 9·11테러참사 이후 아랍계에 대한 사회적 반감을 표현하고 있다. 또 LA길거리에서 한인 여성과 흑인 남성이 관련된 교통사고 장면도 영화 중 나온다. 다른 어느 할리웃 영화처럼 이 영화에서도 한인은 영어 못하고 매너 없는 이민자로 묘사됐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숨기고 싫은 것을 지적 받았다는 기분 때문인지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 연속극 비디오를 보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한인들이 이번 주말에는 ‘크래쉬’를 한번 보고, 잊고 살았던 인종관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을 지울 수 없다. 인종편견 및 갈등 없는 사회로 가는 해법을 찾으려면 정확한 문제 파악이 우선돼야하기 때문이다.
김경원
사회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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