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이다. 또 미국민은 과거 어느 때보다 높은 생활 수준을 즐기고 있다. 그런 미국 가정의 재정은 얼마나 탄탄한 기초 위에 놓여 있을까.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가 최근 발표한 소비자 재정에 관한 보고서는 충격적이다. 보통 미국 가정이 은행 구좌에 갖고 있는 돈은 3,800달러. 이들이 살고 있는 집의 가격은 16만 달러지만 그 중 9만5,000달러를 빚지고 있다. 가구 당 소득은 4만3,000달러고 평균 2,200 달러의 크레딧 카드 빚이 있다. 개인 은퇴 구좌가 있는 가정의 전체의 절반 정도, 그나마 있는 사람도 거기 들어 있는 총액은 3만 5,000달러에 불과했다.
여러 연령 계층 중 소득이 높은 45~54세 그룹의 경우 겉으로 보기에는 형편이 가장 나아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연 소득은 6만1,000달러가 되지만 이들도 돈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버는 대로 다 써버리기 때문이다. 이들의 은퇴 구좌에 들어 있는 돈은 불과 5만 5,000달러. 재정 전문가들이 편안한 은퇴를 위해 가구당 필요한 액수인 150만 달러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게다가 이들에게는 더 이상 노후를 준비할 시간이 별로 없다. 10만 달러 이상의 최고 소득층이 갖고 있는 은퇴 자금도 30만 달러 선이다.
35세 이하 가구의 은퇴 자금 총액은 불과 1,800달러.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들이야말로 노후에 대비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30년이란 세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달러가 매년 10%씩 불어나면 30년 후 8배가 된다. 얼마나 일찍부터 저축을 시작하느냐가 얼마나 안락하게 생의 황혼을 마감하느냐를 사실상 결정짓는 셈이다.
늘어나도 시원치 않은 판에 일반 가정의 인플레를 감안한 실질 소득은 2004년 전년에 비해 2.3%나 줄어들었고 재산도 2001년 이후 가장 느린 속도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수년간의 부동산 붐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평균 주택 에퀴티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집 값 오른 것 이상 뽑아 썼기 때문이다. 그토록 뜨거운 부동산 열기 속에서도 미국인들의 에퀴티가 줄어들었다면 앞으로 부동산 경기가 식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는 물어보나 마나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수년간 14번이나 금리를 인상한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는 앞으로도 여러 차례 더 금리를 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FRB의 금리 인상 상한선이 당초 예상했던 5%대를 넘을 것이란 예상이 나오면서 그 동안 좀처럼 오르지 않던 장기 금리도 3년 반만에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금리의 상승은 소비자들에게는 크레딧 카드 부채 부담을, 변동 이자율을 택한 주택 소유주들에게 모기지 상환 부담을 더 무겁게 할 것이 분명하다.
1930년대의 대공황을 경험한 세대들은 다시는 호경기가 돌아오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최악의 시절이 지난 지 30년이 된 1960년대까지 침대 매트리스 속에 돈을 숨겨 둔 이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숱한 은행이 망하는 것을 본 이들은 은행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지난 20여 년 간 장기 호황을 경험한 미국인들은 자신에게 이런 어려운 시절이 닥치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는데” “다들 그렇게 사는데” 등등의 이유로 버는 대로 쓰고 부족한 것은 빚을 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다. 미국인들의 평균 저축률이 사상 최악인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는 것도 이런 사고방식 탓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장기 호황도 장기 불황도 예외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 예기치 못한 재난은 준비하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 잘 찾아온다. 한인 사회도 유례없는 부동산 붐에 도취돼 흥청망청 쓰는 것이 정상이고 돈을 아껴 저축하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 더 늦기 전 앞으로 다가올 어려운 시절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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