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경(본보 객원기자)
다람쥐 꿈을 꾸는 아이 (2)
‘공포의 대지진’이라는 영화를 영어자막 없이 신나게 보고있는 아이가 기특해서 알아듣겠냐고 물었다. 안 봐도 비디오인 내용인데 그것도 못알아듣겠냐는 듯한 건방진 태도를 보이면서 고개를 끄떡한다. 엄마가 누구든가 그래도 확인에 나선다.
“그런데 하나만 물어보자. 공포가 무슨 뜻이야?” 순진무구한 눈을 잠시 반짝거리며 나름대로 머리를 가동시키는 듯 하더니 입력시킨 질문의 답이 출력되었나보다. “공포? 에이 그게 city 이름이지요. 김포공항 할 때 그런 거요.”한다.
아! 이 아이가 정녕 꼴지를 하고 말겠구나. 공포를 샌프란시스코나 LA쯤으로 알아듣는 아이와 앞으로 한국 중학교에서 벌일 전쟁이 실감나면서 내 사전에는 과외공부란 없으니까 쓸데없이 치맛바람 일으킬 생각일랑 말라고 못박아 놓은 남편이 야속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
한국에서 오래 살았다는 미국인이 TV에 나와 한국어의 ‘저기’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고생 안한다는 경험담을 털어놓는 걸 보았다. 영어의 ‘there’은 그냥 there로 알면 되는데 한국인의 ‘저기’는 저기, 저어기, 쩌어기~ 등등이 달라, 버스 정류장을 묻고 가르쳐준대로
‘쩌어~기’까지 걸어가다가 죽도록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개그맨 뺨치게 한다. 미국인은 ‘there’에 데얼이나, 데에~얼이나, 떼~에얼이라는 말은 안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이도 그럴 것이 분명했다. 눈치 없이 굴어 웃음거리가 되거나 왕따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첫 등교하는 날을 앞두고 떠듬떠듬 자기 소개를 연습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걱정이 더욱 쌓여갔다. 지금이 제일 예민한 사춘기 시절인데 깊은 상처를 받으면 어쩌나 싶으면서 학교 안가겠다고 하면 매를 들어? 사내녀석이 산전수전 다 겪어야 사람이 되지 뭐. 이런저런 생각들에 마음은 계속 어수선했다.
학교 첫날을, 아이는 한 떼의 친구들과 빗자루 들고 운동장 청소하는 것으로 마치고 신발주머니를 빙빙 돌리면서 실내화를 신은 채로 입이 귀에 걸려 돌아왔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왕따는 당하지 않았음을 알아챌 수 있었고 그런만큼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학교에서 어땠어? 애들하고 말은 통해?” “엄마, 그런데 한국 여자아이들이 진짜 무서워. 남자애들을 막 주먹으로 때린다.”
아이가 돌아와서 신나라 들려주는 첫번째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래서? 하루종일 학교에서 아이가 어떻게 지냈을까 염려했던 물음들이 꼬리를 물고 터져나왔고 아이의 대답이 이어졌다. 상냥하신 선생님의 배려로 친구 한 명이 시작부터 끝까지 돌보아 주었고 그 아이와 금새 친해진 이야기, 쉬는 시간에 반 친구들과 소문 듣고 호기심에 찾아온 다른 친구들에 둘러싸여 결국 책상에 엎드려 버린 이야기를 싫은 기색없이 이어간다.
“왜 그랬는데?”하고 묻자 “애들이 자꾸 ‘야! 너 한국말 할 줄 알아? 영어 잘 해? 한 번 해 봐.’그러잖아.”
창피하긴 했어도 점심 시간에 급식까지 꼬박 챙겨주는 친구들의 그런 관심이 아이에게는 정겹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학교 첫날은 성공이었다.
“그런데 엄마 한국애들은 이상해. 화장실 갈 때도 같이 가자고 그런다.”
드디어 아이에게 한국의 그 찐득한 정을 맛 볼 차례가 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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