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초심(初心)대로 살지 못하고 동서남북, 조석(朝夕)변으로 살게 된다. 부부 관계가 그렇고 형제 친구 사이도 그렇다.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가 서로 처음에 약속한 대로라면, 미움도 배신도 슬픔도 없을 것이고 아름다운 가정, 밝은 사회가 될 것이다.
친구들과 자동차 여행으로 시카고 부근 어느 작은 도시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허름한 간판 하며 낡은 테이블 등으로 보아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골 순대국 집 같은 분위기다. 그래도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우리 일행은 식탁에 자리하고 앉았다, 모두가 ‘우거지 갈비탕’으로 남북통일 했다. 술도 주문했다. 주인아저씨라고 생각되는 무뚝뚝한 사나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가더니 밑반찬에 술잔과 소주병을 퉁명스럽게 놓고 갔다.
나는 바람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을 보다가 광고 같은 글을 발견했다.
저 여자를 만난 것이 잘못이고/ 저 여자와 결혼 한 것이 잘못이고/ 저 여자와 혜여지지 못 한 것이 잘못이고/ 저 여자와 지금도 살고 있는 것이 더 큰 잘못이다.
나는 푸념 같은 글을 읽고 카운터에 앉아 있는 사나이를 보니 텁수룩한 얼굴 하며 그 차림새가 임꺽정 졸개 같이 보였다,
우리는 소주를 한잔씩 마시고 고추조림으로 안주를 하고 있는데, 넉넉하고 태평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갈비탕을 가져 왔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벽 쪽을 가리키며, “저 여자… 가 누굽니까?” 아주머니는 카운터를 흘낏 쳐다보고는 “누구긴 누구겠어요, 나지” 우리 일행은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술잔을 들고 술병을 보았다, 술은 소주의 대명사 진로(眞露)가 아니고 ‘처음처럼’이었다. 한국에서 여자들을 겨냥해서 만들었다는 도수가 낮은 술이다. 저 부부를 보아하니 50대는 넘은 듯 한데 아직까지도 만남을 후회 하고 있나…, 포장되지 않은 글이 너무 솔직하지만 저 남자는 간 큰 남자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는 노래처럼 저 사람들의 만남도 우연은 아닐 텐데…
과학 전성시대, 문명 윌빙시대 라는 지금 세상은 가치관의 기준을 물질과 쾌락에 두고,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 되었고, 결혼은 장난이고, 이혼은 똑똑한 사람들의 훈장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가정을 이루고 힘들게 자녀를 키우는 것은 남들이나 하는 짓이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스릴을 만끽하며 사는 것이 잘 사는 인생으로 정의되고 이런 생활이 유행의 흐름이 되고, 본인이나 부모나 사회가 용인해주는 것이 흉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나의 할머니 시대만 해도 사진보고 결혼하기도 하고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른들이 결정하는대로 혼인하고, 초례상에서 처음 보는 신랑 각시가 한 몸 되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자식 놓고 잘 살아 오셨다. 6.25 세대인 우리만 해도 신부님이나 목사님 주례로 “하나님이 짝 지어준 것을 사람이 떼어 놓지 못 하리라”를 지키며 한생을 ‘처음처럼’ 살아 왔다.
출출 했던 뱃속에 갈비탕 국물이 들어가고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갔다. 나는 벽에 붙은 글에 제목을 달아 주고 싶었다. ‘처음처럼’.
만난 것도 잘못이고, 결혼 한 것도 잘못이고, 이혼 못 한 것도 잘못이고, 지금도 살고 있는 것이 잘못 이라고 했지만, 지금도 앞으로도 ‘처음처럼’ 살면, 아무리 잘못이라고 푸념하는 사나이도 끝내는 말없이 순종하고 사는 아내에게 감사할 것이다. 비록 어려운 이민살이에 국밥 장사 하며 살아도 저 술병 이름처럼 처음처럼만 살면, 그 어느 날 하늘나라에 가서 이혼 하지 않은 벌(?)로 ‘처음처럼 상’이라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그때는 저 남자가 이렇게 글을 바꿀 것이다.
‘처음처럼’
저 여자를 만난 것이 기쁘고/ 저 여자를 만난 것이 감사하고/ 저 여자를 만난 것이 다행이고/ 저 여자와 같이 죽은 것이 더 큰 행복이다.
찰라 같이 짧고 풀잎에 이슬 같은 인생길, 처음 사랑이 끝 사랑 되도록 서로 손 잡고 살아갑시다.
윤학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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