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서 아는 바는 한국이민 1세였다는 사실밖에 없다.
안다면 그저 고향이 북한이신데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어떻게 해선가 지금의 남한으로 내려오셨다는 거다.
짐작컨대 가족들 중에 유일한 생존자이셨던 것 같다. 아마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당신의 과거와 가족에 대해서 말씀이 없었던 거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고국을 그리워하셨지만 한 번도 돌아가고 싶다든가 방문이라도 하고프다는 말씀을 일체 하신 적이 전혀 없다. 아버지의 독립심, 운전을 배우시던 일, 첫 승용차 구매를 위해 돈을 저축하시던 일, Ford 중고차 Model T, 어린 딸 둘을 거느린 여자와 결혼해서 올라아(Olaa, 지금은 Keeau)로 이사 가신 것, 거기서 우리 형제자매들이 성장했다는 사실.
이런 게 우리한테는 다 경이롭고 불가사의한 일이다.
어쩌다가 아버지는 원시림 같은 파나에바(Panaewa) 숲 속 깊이 울창한 나무로 빽빽이 둘러싸인 전원적인 올라아로 이사를 하게 되신 걸까? 길이래야 철로변의 소로 하나. 그나마 무성한 정글로 뒤덮여서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집으로 이어지는 길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또 한 가지는, 영어로는 글도 읽을 줄 모르고 대화 몇 마디밖에 못하는 양반이 소목장주인이며 땅을 6만 에이커 이상이나 소유한 지주이며 항시 바쁜 그 지방의 유지 윌리엄 허버트 쉬프먼씨와는 어떻게 친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아직도 궁금한 일이지만, 어쨌거나 우리 가족이 그런 데 터를 잡고 살게 된 일과 또 쉬프먼씨를 알게 된 것은 큰 축복이었다.
이 이야기는 갑자기 병이 난 여섯 살짜리 딸을 등에 업고 허겁지겁 파나에바 숲 속에 파묻힌 외딴 집으로부터 신작로로 뛰어 나가서 차를 얻어 타고 농장병원으로 가는 순간의 어머니를 기점으로 잡아도 괜찮을 것이다.
양쪽으로 판다누스, 구아바, 망고 나무 등 (간간이 향내가 짙은 진저(ginger)를 포함한) 열대성식물이 무성한 그 반마일의 외길여정은 등에 업혀있는 귀여운 맏아이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사랑과 고통이 겹쳐져서 더욱이나 힘들었다.
아버지는 일 나가 안계시고 집에는 전화도, 전기도 없고, 차를 가진 이웃집도 일가고 없었다. 그때 집에는 여섯 살 난 성희언니, 그 밑에 네 살 배기 여동생, 그리고 한 살 난 남동생 -- 애들은 이렇게 총 셋이었는데, 당시 아래 두 아이는 친절한 이웃집에서 돌봐주었다.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었지만 그때 큰 언니는 뜻밖의 죽음을 맞게 되었고, 그 사무치는 슬픔 때문에 어머니는 일 년 동안 내내 날마다 엉엉 소리 내어 우셨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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