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대통령 탄신
▶ 132주년을 맞는 감회
3월 26일은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며 90평생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이승만박사의 132주년 탄신 기념일이다.
그는 40여년에 걸친 해외 독립투쟁에서 하와이를 기지로 삼았을 뿐 아니라 생의 마지막 다섯 해를 이곳에서 보낸, 하와이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분이다.
구한말 민주개혁을 위한 그의 투쟁이나 독립운동 지도자로서의 공로도 크지만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공산침략을 격퇴하고 한미동맹의 쟁취함으로서 오늘의 한국의 기초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공적을 남긴 분이다.
해방 직후 스탈린은 한반도 공산화를 목표로 1946년 초부터 북한 공산정권 수립에 착수하면서 남한에 공산분자를 침투시켜 남한을 혼란에 빠뜨렸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 타협하여 한반도에 신탁통치 또는 좌우합작정부를 구성하려 했다.
구한말부터 한반도를 삼키려했던 소련의 야욕을 잘 아는 이승만박사는 소련과 타협한 정부수립은 결사반대했고 이미 북한에 수립된 공산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남한만의 민주정부 구성이 불가피하다며 이를 설득하기 위해 워싱턴까지 달려갔다.
유엔은 총선거를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했으나 소련과 북한공산집단의 거부로 남한지역만의 선거로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이다.
남북을 분단시킨 것은 공산집단이며 이박사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남한까지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공산세력은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제주에서 4.3사건을 일으켰고 정부수립 두 달 후에는 여수에서 군사반란을 주동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이 대통령은 국가보안법 제정 등으로 과감하게 대응하여 공산세력을 일망타진했고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로부터 농민을 해방시켜 공산주의 선전에 넘어가지 않도록 했다.
그는 6년제 의무교육 제도를 도입하고 범국가적 성인교육도 실시하여 해방당시 78%였던 문맹률이 1960년에는 5%로 줄어드는 교육혁명을 주도하여 근대국가로 발전하게 했다.
그의 공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한미동맹의 쟁취이다. 미국은 월남에서와 마찬가지로 휴전만 하고 한국을 떠나려 했지만 이 대통령은 휴전반대, 반공포로 석방 등, 온갖 수단을 통해 기어코 한미동맹을 쟁취했다.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한국이 공산화되었을지 모르며 그 후 경제발전이나 민주발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우리가 그처럼 위대한 지도자를 가졌다는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승만대통령의 애국애족정신과 건국이념을 바로 알고 계승하는 것은 뜻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충남
(the East-West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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