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무진 한국여인 야물이’ <11>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우리 개들의 한 가지 흥미로운 버릇이 뭐냐면, 녀석들은 절대로 집터 어디에나 숲 속에다가 “일“을 저지르는 법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친구가 호놀룰루로 이사 가면서 준 스노우볼(Snowball)이라는 슈핏츠는 예외로, ”일 볼“ 시간이 되면 으레 닭장을 지나 멀리 떨어진 이웃집까지 종종 걸음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양계업은 힘든 일이었으나, 어머니는 언제나 계란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채식 반, 육식 반인 나로서는 그걸 증언할 수가 있다. 한 번은 식탁으로 가다가 바비큐 만들어 먹은 스테이크를 보고 뿌루퉁해져서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 된 나는 “먹을 게 하나도 없잖아”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웃으면서 “내 계란 하나 프라이 해 주마”라셨다. 에그 프라이 하나와 밥 한 공기에 간장을 발라 먹었더니 배가 불렀다.
어머니는 말린 양파를 끓여서 우리의 이스터 에그*를 채색해주셨다. 우리는 학교에서 만든 부활절 바구니에 담으려고 어여쁜 갈색 계란을, 급우들은 빨강?노랑?파랑?풀색 계란들을 갖고 왔다. 색깔은 형형색색이어도 맛은 다 같은 계란이었다.
우리 집에서 쓰는 물은 지하수로 충분했다. 그러나 가뭄이 들면 농장에서 물을 가져와야 했다. 우리 식구들과 양계에 필요한 물은 펌프식 농장트럭으로 실어다주었는데, 그것은 무료 서비스였다. 일회 공급량은 한 트럭 반분 정도였고, 이따금씩 어머니가 기사와 흥정해서 치킨 수프를 손수 만들어주시면 양계용 시멘트탱크 하나에 들어갈 만큼을 여분으로 물을 더 주었다.
트럭기사들은 우리 집에 물 날러주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우리한테 부엌과 용조를 덥히는 데 쓸 레후아(lehua) 나무덩어리도 공급해주다. 그러면 아버지와 뭉환 오빠는 그걸 도끼로 1인치 두께의 조각을 내어 밥 짓는 데 쓰도록 하고 큰 토막들은 욕조를 데우는 데 썼다.
양계사업은 외딴 곳이라도 불편한 점이 많았다. 한밤중에 닭이 놀랜 소리를 내어서 잠을 깨기도 하고, 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아버지가 그쪽으로 개를 “공격!” 이라고 명령을 해서 쫓아 보내면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수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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