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식수는 빨리빨리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다. 빈 물통은 또 채워주었다. 우리 집 부엌 앞은 군인들의 쉼터가 되었다. 그들 중에서 기운이 좀 남아있는 네다섯 명은 물통을 채우는 즉시 행진을 계속했다. 뒤져 있는 동료들을 위해서였다.
추가 원조가 기차로 도착했다. 철로감시원 한 분이 육로-철로 겸용 차에 수마일 뒤진 군인들에게 갖다 물통을 싣고 왔다. 군인들이 우리 집으로 줄줄이 찾아왔다. 어느 군인의 말이, 모두 이틀 동안 먹은 게 없노라고 했다. 어머니와 순이 언니는 계란을 프라이하고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알 낳는 닭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동네 베이커리에 가서 식빵을 여러 봉지 사다가 군인들 모두에게 계란 샌드위치를 먹였다. 지친 군인 한 사람은 “제 목숨을 구해주셨어요”라고 했다. 우리는 부엌 옆 침실창문으로 내다보며 군인들에게 미소를 던졌다. 어느 군인은 나를 보고 “선샤인(Sunshine)이라고 불렀다.
아홉살 소녀인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갈증도 풀고 요기(療飢)를 마친 뒤 기운을 되찾은 군인들은 철길을 따라 캠프로 갔다.
아버지는 아주 지친 군인 몇 사람을 태우고 기지로 데려다 주었다. 그들은 아마 그날의 일을 가족들에게 편지로 죄다 얘기해 주었겠지. 얼마 후에 어느 하사(下士)관 한 사람이 올리브 한 갤런을 가지고 왔다.
우린 그때가지 올리브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만난 군인들은 다 좋았다. 이 즈음해서 양계사업은 서서히 거두고 대신 라우할라(lauhala) 사업이 움트기 시작했다. 이것은 바로 다음 장(章)에서 하게 될 이야기다. 사람들은 채소 가꾸기를 권장 받았고, 채소밭은 “승리의 가든(Victory Gardens)이라고 불렀다.
여름방학 중에 뭉환 오빠는 (그때 나이 열네 살) 숲 속에 들어가서 토마토를 길렀다. 집에서 철길을 따라 1마일 가량 되는 곳에 밭이 있었는데, 철길에서 계곡으로 300야드 정도 쑥 들어가는 곳이었다. 탁 트인 철길 쪽 생태계로부터 계곡으로 가는 길은 급경사였으나 일단 계곡에 들어가면 갑자기 평지가 되었다. 계곡 자체는 거대한 망고나무와 빵 나무들이 하늘을 뒤덮어서 햇빛을 가로막아 습지면서도 다소 어둡고 시원한 환경을 조성했다. 섬뜩한 정적마저 흘렀다. 어둑하게 천개(天蓋)가 덮힌 계곡은 또 갑자기 밝은 풀밭이 나오면서 오빠의 채소밭으로 이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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