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1946년 1월이 되는 무렵에는 우리 집에는 라우할라를 짜는 사람이 4명으로 늘었다. 그 중에 프랭크 오빠가 열일곱 살로 제일 위였고 열한 살 헬렌이 제일 어렸다. 정말 “딱했다.” 각자 맡은 하루 매트의 양이 식탁용 2세트(낱개로 따지면 14쪽)였다. 학교 가는 날은 그 절반이었는데, 수업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3시 반부터 8시까지 짰다. 학교가지 않는 날은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짰다.
누가 불평을 했던가? 내가 했다. 나 말고는 아무도 불평을 한 기억이 없다. 나는 시험이 있는 날 전야에 준비하느라고 늦게까지 잠을 못잘 적에 “얘야, 10시가 지났으니 가 자거라. 내일 지각할라”라고 하시는 어머니에게 투정을 했다. 윤성이는 일을 하다가 편두통이 나도 전혀 불평을 하지 않고 할당량을 다 채웠다. 헬렌은 가끔 맡은 양을 다 하려고 밤늦게까지 일했다. 나는 때때로 한 눈으로 책을 보면서 매트를 짰다.
우리가 만드는 라우할라 제품이 늘어나면서 원료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다. 원료로 쓰는 브라운 색 라우할라 잎은 결핵환자를 수용하는 푸우마일레(Puumaile) 병원 너머에 있는 케아우카하 숲에 들어가면 엄청나게 많았다. 특히 그 숲의 건조한 쪽에서 자라는 식물은 주로 라우할라였다. 우리 집에 인접해 있는 파나에바 숲은 거기보다 강우량이 많아서 식물이 다양했다.
구아바, 망고, 아보카도, 레후아, 나무고사리, 빵나무 등등. 케아우카하 숲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는 병원을 지나면 끊어지고, 거기서부터는 모랫길을 따라가야만 숲이 나왔다. 또 모랫길이 끝나는 산기슭부터는 소로를 따라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가끔 아버지와 같이 걸어서 케아우카하 숲에 들어가 브라운 색 라우할라 잎을 골라 모았다. 숲 속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 차를 세워 둔 (모랫길이 해변과 만나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혼자 그곳에 가실 적에는 어쩌다가 딴 사람을 만났었다. 하와이계 청년 한 사람이 커다란 라우할라 뭉치를 짊어진 아버지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이, 제가 도와드리지요. 그러고는 라우할라 두 뭉치 중에서 큰 걸 받아들고 무거워하는 기색 없이 쉽게 걸어가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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