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아버지는 뒤질세라 빨리 걸었다. 청년은 그렇게 여러 번 아버지를 도왔는데, 단 한 번도 아버지가 차를 주차시켜 둔 모랫길을 지나 도로가 포장된 데까지는 나온 적이 없다. 아버지 생각에 그 친절한 사람은 병원의 직원이 아닌가 싶었다. 잠그지도 않고 해변에 주차해둔 아버지의 차는 아무도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가시채로 라우할라 잎을 걷어모으는 일은 우리 어린 손에 힘겨웠지만 장갑은 끼지 않았다. 퇴색된 라우할라 짚단에는 지네들이 잘 끼어들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라우할라를 운반하면서 한 번도 지네한테 물리지 않았다. 나만 한 번 라우할라 나뭇가지에 올라가 있다가 놀랜 적은 있다.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지네 한 마리가 내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거였다. 나는 놈이 무릎까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손으로 톡 쳐버렸다.
라우할라 사업 3년 끝에 우리는 아버지의 Model T의 후신이 되었던 구식 Model A Ford를 갈아치울 만한 여유가 생겼다. 아버지는 생전에 Model T를 두세 대 사용하셨는데 모두 중고차였다. Model T를 최종으로 쓰신 해가 1946년이었다. 1946년 4월 1일 우리 반 볼드윈(Baldwin)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다.
만우절 날이라 우리는 Happy April Fool’s Day라며 인사를 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퉁명스레 만우절이 다 뭐냐라고 하는 거였다. 당시 우리 학교는 힐로(Hilo)와 라우파호에호에(Laupahohoe)로부터 수마일이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때 특히 그 두 곳을 강타한 쓰나미(해일)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힐로만(灣) 쪽으로 나 있던 건물들은 거의 다 파괴되고 바다로 휩쓸려 나간 것도 많았다.
숱한 사람들이 죽거나 익사하고 더러는 망망대해로 빨려나갔다. 라우파호에호에 주민들 중에 사망자수가 특히 많았다. 여기저기 철로가 망가져서 수리 불가능 상태가 되고, 복구는 너무 돈이 많이 들어서 할 수가 없었다. 1946년의 해일로 인한 파괴는 하도 컸던 지라 철로와 각목들은 떼어내 가지고 팔거나 아니면 치워버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전 보다 넓고 반듯하고 또 더 안전한 진입로가 생겨서 새 차가 다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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