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둘은 형님의 배낭을 번갈아 짊어지고 즐겁게 서로 조잘거렸다. 오빠는 휴가를 나와서도 우리랑 같이 가사(라우할라 사업)를 도왔다. 한성이는 창문도 없는 데서 석유스토브에다가 맛있는 피넛버터 쿠키를 구웠다. 오빠가 동료들과 나눠 먹으라고. 깨진 유리창은 판지로 막아 놓고 쿠키가 졸깃졸깃해지라고 연신 밀가루 반죽에다가 물을 끼얹었다.
오빠는 군복무 중에도 허락을 해줘서 1948년에는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야간 업무는 알약을 조제해주고 진료기록을 하는 거라서 낮에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월급의 일부는 집으로 보냈기 때문에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막사로 돌아갈 교통비가 없을 적이 빈번했다. 땅바닥이나 쓰레기통을 뒤져서 동전을 찾다보면 귀대할 즈음엔 식사시간을 놓쳤다고 이제사 우리한테 털어놓는다.
때로는 버스비 낼 동전을 주웠다고 한다. 군복무를 3년간 하고 나서는 ROTC 과정에 들어가서 예비역장교가 되었다. 계급은 중위였다. 나는 언젠가 오빠가 하와이대에서 자기 부대를 인솔하는 걸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때 모습이 아주 또릿또릿 세련되고 전문인다웠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현역으로 들어갔다. 1952년 6월 한국에서 6.25 사변이 터졌을 때였는데, 공교롭게도 오빠는 이듬해 1953년에 한국으로 배치되었다.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지만 우린 교회에 나갔다. 어머니는 프랭크 오빠의 무사귀환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다 교회에 가서 세례를 받게 하셨다. 오빠는 식구들이 걱정할까봐 한국서 편지를 써 보낼 적에 부하를 이끌고 순찰을 나갔다는 말은 절대로 내비추지 않았다. 막사에서 그저 무료하게 앉아있는 것보다는 순찰 도는 편이 낫다고 했다.
종규 외삼촌은 오빠가 한국에 와있다는 걸 알고는, 미군부대가 금지구역이었지만, 꼭 만나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외삼촌은 한국정부의 고관(상공부차관)이고 또 영어도 말하기나 쓰기가 다 유창해서 오빠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짚차 옆엔 기사가 있고 뒷좌석엔 보좌관이 따랐기 때문에 외삼촌은 어디까지나 지위가 높은 관리다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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