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외삼촌 일행을 기다리던 오빠는 외삼촌을 알아보는 데 문제가 없었다. 우리 집에는 여기저기 외삼촌의 사진이 걸려있었으니까. 외삼촌은 국산 배 한 바구니를, 프랭크 오빠는 고급 휴대용 라디오를 선사했다.
꿈같은 장면이었다. 한국이민의 아들인 미군이 모국의 자유를 수호하려고 해외로 나와서 34년 전 자기 어머니가 손을 흔들며 작별했던 그 동생(우리에게는 외삼촌)을 만나 인사를 하는 그 장면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완전한 일주(一周)를 마무리하는 거였다.
한국에서 프랭크 오빠와 종규 외삼촌의 만남(이 사진은 1953년 9월에 찍은 것이다. 바랬지만 아주 소중한 기록이다) 자기는 영웅이 아니라지만, 우리 오빠는 군에 봉사한 공로로 <전투보병 배지>와 <청동성장>을 받았다. 휴전 바로 전날 밤 오빠는 밑으로 큰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고지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휴전을 축하 하느라고 갖가지 총기를 다 꺼내다가 쾅쾅 쏴댔다. 오빠는 일찍이 그렇게 멋진 불꽃놀이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오빠는 한국전쟁이 끝나던 1953년 12월에 조기제대로 군대생활을 마쳤다. 18세에 들어가 25세까지 복무했으니까 총 7년간 군대생활을 한 것이다. 우리 집 라우할라 작업실에서 일을 할 적에 우리에게 소중한 낙(樂)은 휴대용 제니스(Zenith) 라디오였다. 값비싼 67.5볼트 밧데리를 쓰는 것인데, 헬렌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조절하여 건전지가 되도록이면 오래 가게 했다. 그 라디오는 오랫동안 켜두지 않고 꼭
정해놓은 프로그램만 들었다. 우리는 <양키즈>와 <인디언즈> 두 팀의 야구경기를 즐겨 청취했다. <버디>라는 마이나 새는 놀랍게도 라디오에서 베이스볼이라는 단어를 배워서 뇌까렸다. 헬렌은 <헬렌 트렌트, Helen Trent>라고 하는 비누광고를 좋아해서 밧데리가 약해지면 라디오를 자기 귀에 바짝 갖다 대었다. 헬렌은 우리 집의 장부계원이기도 했다. 4개월에 한 번씩 보고하는 면허세 계산을 자랑스럽게 하곤 했다.
고등학교 때 나는 사내애들이 윤성이를 눈여겨보는 걸 눈치 챘다. 그 애는 언제나 깔끔한 차림으로 머리에는 난초꽃을 꼽고 새 차를 드라이브하는 틴에이저였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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