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당시 애였던 장본인 임 창조가 프랭크 오빠에게 들려준 이야기). 종규삼촌은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어디든지 모시고 갔다. 친지방문, 시내구경, 쇼핑, 맛있는 식당 등등.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한국말만 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길거리 표지도 한국어요, 어디엘 가도 만나는 사람들이 다 코리안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 가장 즐거운 일은 동생과 함께 하는, 특히 남들이 다 잠든 밤 오누이만이 갖는 시간이었다. 동생(종규 삼촌)은 숨겨두었던 최상급 과일을 내다가 누이와 같이 여유롭게 지나간 얘기를 오순도순 주고받으며 나눠먹었다.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누이와 남동생 둘의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었다. 둘은 어릴 적에 겁도 없이 집을 나간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 웃었다. 고생한 과거를 돌아보면서는 서로 위로해주었다. 성인이 되어 이룬 일은 칭찬해주고, 오누이는 그렇게 서로 마주보며 나누는 시간이 행복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김치 솜씨에 특별히 관심이 갔다. 한국인들의 인기 최고인 김치를 만드시는 할머니의 손 움직임을 열심히 구경했다. 한국에서 만드는 김치는 하얀 배추에 시뻘건 고춧가루가 울긋불긋 붙는 것이다. 어머니는 마지못해 할머니의 김치가 특품임을 인정했으나 외국인은 자기가 만드는 덜 매운 김치를 선호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국을 떠나는 것은 달콤한 슬픔이었다. 이제 다시는 동생과 어머니를 볼 수 없으리라는 걸 어머니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직계 가족이 기다리는 파나에바 숲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고향방문 중에 할머니와 종규삼촌을 비롯하여 일가친척 모두가 다 잘 살고 있다는 사실에 어머니는 저윽 놀랐다. 어느 정도 수준은 될 거라고 짐작을 했었지만 부유한 처지라는 건 미처 몰랐다.
반대로 고향분들은 우리가 부자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P.O. Box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에서는 부의 상징으로 이해했다. 어머니의 고향방문으로 양쪽이 다 눈을 뜨게 되었다. 종규삼촌과 할머니는 어머니를 만나고 나서 달라진 게 사실이다. 할머님은 어머니가 다녀간 이듬해에 작고하셨다. 할머니의 유언을 따라 시신은 남해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안치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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